본문 바로가기
문화의 향기/시네마천국

바벨 - 소통의 장벽

by 천 지 인 2007. 2. 27.
 

 

 

1. 소통의 단절과 복원


  4개의 국가(미국, 일본, 멕시코, 모로코), 5개의 언어(4개국의 언어 및 수화), 2개의 세계(중심부와 주변부, 부모와 자식, 남자와 여자)에서 다양한 소통과 소통의 단절이 전개된다. 제일 먼저 불씨는 가족간 소통의 단절이다.

  미국인 부부 리차드와 수잔의 단절, 일본인 농아 치이코와 아버지의 단절, 모로코인 아흐메드와 유세프 형제간의 단절...  이들은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수잔은 아들 샘의 죽음으로, 치에코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흐메드는 유세프의 엿보기 등으로 상호간 소통이 두절된 상태이다.

  그러나 소통은 극단적 상황에서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총에 맞은 수잔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니 배설의 와중에서 리차드와 수잔은 상호간의 육체를 매개로 소통행위를 한다.

  농아로서 세상과 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치이코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자신의 존재를 몸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소통은 그렇게 본인의 의도대로 쉽지 않다. 결국 치이코는 발가벗은 상태에서 비로소 아버지에게 닫혀 있던 마음을 연다. 모로코 형제의 소통은 비극적이다. 형의 죽음 앞에서 형에 대한 동생의 애절한 사랑이 표현된다.

 


2. 나비효과


  그런데 이런 비극적 상황은 역설적으로 낮선 사람간의 소통에서 기인한다. 모로코로 여행을 간 치이코의 아버지는 현지 안내인의 친절에 보답하는 의미로 라이플총을 선물한다. 즉 상호간의 마음이 총이라는 물건을 매개로 소통된 것이다.

  이 총을 받은 이는 자칼로부터 양떼를 보호하려는 압둘라에게 총을 판매하며, 압둘라는 두 아이에게 총을 줌으로써 자칼로부터 양떼가 보호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두 아이는 무료하다.

  이 무료함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양떼보호용 총이다. 형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우발적 사격행위, 이 행위는 미국인 여행객에게 치명적 상처를 주며 대서양을 건너 멕시칸에게 전달된다.

  총을 맞은 사고로 귀국일을 지키지 못하는 리차드와 수잔. 이들 부부의 아이를 돌보는 멕시코인 보모 아멜리아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 결국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아멜리아는 멕시코로 넘어간다.

  1세계에서 3세계를 넘어 가는 것은 너무도 쉽다. 하지만 3세계에서 1세계로 들어가는 간단치 않다. 즐거운 결혼식 파티를 끝내고 미국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녀의 15년 미국생활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이며, 결국은 15년전의 그녀로 - 무일푼으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3. 소통의 매개


  소통의 수단은 굳이 언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표정과 몸짓으로, 혹은 마음이 개입된 물건인 선물로, 나아가 육체를 통한 마음과 마음의 결합 등 그 형식은 다양하다. 이 영화에서 문제의 발단은 아이들의 우연한 장난이 아니다. 일본인 사냥꾼과 알제리 현지 안내인의 언어와 피부색을 뛰어 넘는 소통행위 - 바로 이 소통을 매개하는 라이플총이 문제의 발단이다.

  치이코의 어머니는 부부간 소통의 단절 상태에서 총을 이용해 자살한다. 그녀의 선택은 부부간 소통의 복원이 아닌 파괴였다. 일본에서 극단적인 소통의 파괴도구로 쓰여진 라이플총이 모로코에서는 사냥꾼과 안내인 사이 소통의 매개로 사용된다.

  이것이 압둘라에게는 가족의 파괴로, 총을 맞은 리차드 부부에게는 소통의 복원으로, 어머니의 자살로 방황하던 치이코 부녀에게는 소통의 계기로, 그리고 아멜리아에게는 15년 미국생활의 파괴로 이어진다. 1세계에서 유입된 라이플장총으로 촉발된 나비효과는 1세계인의 소통의 복원과 3세계인의 파괴라는 대비로 종결된다.

  소통을 위한 강력한 무기로서 영화는 육체를 은근히 내비친다. 그러나 우습게도 현실에서 육체는 소통과 상관없이 내동댕이쳐지거나 매매되기도 한다. 즉 육체는 소통의 수단이면서도 소통과는 전혀 상관없이 매개되기도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4. 미국의 실제


  단절된 상호간의 소통은 극한적인 상황에서 벌어진다. 럭셔리한 미국인도 결국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무너지면 누구나 똑같은 똥오줌 신세일 뿐이라는 감독의 조롱, 입만 열면 평화와 인권을 위한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는 그들이 - 같은 나라 사람의 급박한 어려움에 함께 하기보다는 테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줄행랑을 치는 모습에 대한 조소...  이것이 그들의 실제 모습임을 곤잘레스는 역설한다. 

  헐리우드, 대표적으로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 대부분은 동물을 지키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고 결국은 지켜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아닌 주변부 사람들은 죽어간다. 일반적인 헐리우드 영화마다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식상함, 그러나 그들은 자랑스럽게 영화로 표현한다.

  바로 이것이 미국과 미국인의 사고방식이다.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2개의 바다가 동서를 지키고, 멕시코와 캐나다라는 2개 동맹국(위성국?)이 남북을 에워싼다. 마치 해자에 둘러싸인 중세의 성처럼 존재하는 미국 - 동물과 소통을 위한 그들의 지극한 노력, 그러나 제3세계와는 단절과 파괴로 자신들의 안전을 염원하다. 주변부에 대한 무지속의 두려움, 그들은 자신만의 안전지대에 상주하고자 하는 유아적 사고와 행동방식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해자에 둘러 싸인 그들만의 성채도 결국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9.11은 보여 준다. 여기에서 그들은 진정한 소통의 복원을 교훈으로 삼지 않고 3세계에 대한 단절의 심화와 파괴로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테러에 대해 자신들의 극단적인 두려움과 공포심 - 이것은 소통의 단절로 인한 극단적 무지 또는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인 독선에서 기인함을 깨닫지 못한다.

 

 

5. 소통의 장벽


  누구나 다양한 수단으로 소통을 원한다. 그러나 소통의 수단이 때론 칼이 되고 총이 되어 누군가에게 아니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소통에 대한 해석은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일 경우가 많다. 동일한 상황에서 진행된 소통이 서로의 처지 및 편의에 따라 해석되어 진다. 소통의 깊이와 소통의 내면성은 따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깊이에 대해서도 모른다. 단지 소통행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곤잘레스의 결론은 명확하다. 지역과 언어는 소통의 장벽이 아니다. 오히려 상반되는 2개의 세계 - 존재에 기반한 의식의 상이함, 이것이 진정 소통의 장벽이다. 지구촌에 존재하되 구분되는 2개의 세계 - 중심부와 주변부 국가, 하나의 인류이되 구분되는 2개의 성 -  남자와 여자, 가족의 울타리에서 공존하되 서로 다른 의식의 세계 - 부모와 자식...  공존하되 소통은 없다. 소통을 원하되 자기방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간절함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상반되는 2개의 세계가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소통은 일방주의다. 이것을 감독은 1세계의 해피엔딩과 3세계의 비극적 종말로 암시한다.

  1세계의 평화는 3세계의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3세계의 소통이 1세계에서는 자신의 안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1세계의 장총이 3세계 사람들에게는 비극의 씨앗이지만 1세계 사람들에게는 행복의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상반된 현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곤잘레스식 표현이 바로 영화‘바벨’이다.

 

[2007. 2. 27 / 천지인]

 

 

 

 

 

'문화의 향기 > 시네마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엘레지 - 네가 바로 그것이다  (0) 2009.03.25
낮술의 미학  (0) 2009.03.03
워낭소리  (0) 2009.02.19
화려한 휴가  (0) 2007.07.30
우아한 세계  (0) 2007.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