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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민들레별곡

금주 기념 술

by 천 지 인 2007. 1. 31.
 

금주 기념 술


아침 여섯시에 이씨가 찾아 왔다. 또 술병을 들고 우두커니 서서 다 죽어가는 소리로 강씨! 강씨! 부르고 있다. 화가 나서,

“강씨 죽을 일 읎스니 오늘은 절대루 술 입에두 안댈 것인즉 좋게 말할 때 돌아가시요!”

한바탕 공갈을 치고는 탕! 방문을 닫아 버렸다. 정확히 40분쯤 지났는데 성님! 성님! 주태백이 주씨가 숨 넘어가는 인간마냥 불러댄다.

“성님 뒈지지 않았으니 좀 조용조용 얌전하게 찾을 수 없겄는가?”

“조용 조용 얌전헌기 밥 멕여주고 돈 벌어준다요?”

“뭔 일이신가? 데마찌(일 펑크)난 김에 꼭두아침부터 죽기 살기루 퍼마시겄다구 작심허셨는가? 낸 헐 일이 태산 겉이 쌓여 술잔치에 참여허지 못하겠으니 아무쪼록 양해허시시게.”

주둥일 꼼지락거리며 사설을 늘어놓을 눈치라 뒤도 안 돌아보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또 한시간쯤 지나니 이번에는 박씨성님이 부른다. 꽤 오랫동안 못본 사이고 사람 또한 실수없는 점잖은 양반이라 마주보면 술 한잔 사양할 처지가 못된다. 요량이 없으면 그저 숨어 버리거나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다. 숨소리도 안내고 대꾸도 안하니 몇번 부르다가는 ‘사람이 읎나?’ 중얼거리며 되돌아가는 기척이다.

마누라 도망갔다고 징징대며 찾아오면 그 기분 헤아려 위로해준답시고 술상 앞에 앉아 주고, 문간방에서 쫓겨났다고 한숨 내쉬며 찾아오면 그게 불쌍해 술 한잔 안나눌 수 없다. 백마교 건너에 사는 추씨는 낯선 사람 만나면 진땀을 흘리고 말까지 더듬으면서 착 까부라지는 사람이다. 공부도 없고 빽도 없고 번듯한 기술도 없다. 역시 가난하고 주변머리도 없다. 사람 사귀기를 겁내니 친구도 없다. 그런 추씨가 기껏 용기를 내서 낑낑거리며 수줍게 찾아와 “한잔해유...” 그러면 그 꼴이 영 안돼서 한잔 나누게 된다.

이쁜이 누이는 맨날 성질 드런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는 대책없이 집을 나와 이리저리 정처없이 헤매고 다니니 그놈의 인생이 도무지 불쌍해서 한잔 사주게 된다. 혼자 사는 남순 할매는 취하셨다 하면 아예 내방에 퍼질러 앉으셔서 한잔 안 받으면 절대로 안 나가겠다고 땡깡을 논다. 그러니 그 꼴 보기도 싫고 한시 바삐 내몰 요량으로 한잔. 그래 이 동네에 들어와 이젠 아주 술꾼으로 전락해버린 신세다.


내 절대 술체질 아니라고 우기면 천하가 다 낄낄대며 안 믿어주겠지만 우리 집안 내력이 술하고 거리가 먼 것만은 사실이다. 아버지는 밀밭 근처에만 가도 비틀거리는 양반이고 어머니는 사이다 한잔, 박카스 한병만 마셔도 그냥 누워버린다.

목사에 수도승(사) 노릇까지 한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가. 도(道)의 언덕에서 미끄러져 추락해버린 파계승이기도 하겠지만 이놈 저놈 이년 저년 사연 듣고 역사 알면 열불이 나고 설음이 복받치고 가슴이 갈갈이 찢어져 멀쩡한 정신으론 버텨낼 재간이 없다.

그래봤자 술 처먹는 놈치고 핑계없는 놈 없는 법이니 화나서 처먹고, 슬퍼서 퍼마시고, 기뻐서 또 마시고 그러면서 온갖 궤변에 핑계에 자기합리화까지 해대는 주정뱅이들 꼬라지와 내 꼬락서니가 다를 바 없다. 그놈이나 내놈이나 술로 될 일이 어디 하나라도 있겠느냐 말이다.

그리 양조장 술항아리 몇개 껴안고 살다가 엊그제 몸뚱이가 삐거덕거리고 뒷골이 흔들리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불길한’ 경험을 몇번 하고 나니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벌러덩 쓰러져 곧장 가는 것이 아닌가 요사스런 생각도 들었다.

마누라 도망가 환장해버린 박가도 안됐고, 남의 새끼 데려다 키워놨더니 술 처먹으면 지 키워논 부모 두들겨 팬다고 노상 징징대는 송씨도 불쌍하고, 이쁜이 누이, 남순 할매, 조씨의 주착바가지 눈물, 김씨의 헛소리, 추씨의 소심증, 이씨 영감의 퀭한 눈... 줄줄이 안됐고 불쌍하고 처연하고 암울하고....,

그래도 그런 것은 이제 둘째다! 우선 내가 살고 보자! 이제부터 딱! 이다.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글도 열심히 쓰고 도(道)에 치열하게 정성스럽게 용맹정진하자!

그리고 사흘. 어떤 인간도 다 물리치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천하없는 자리에 나오라 해도 태산 반석처럼 꿈쩍도 않고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었다.

난 한다면 한다!


저녁 6시. 따르릉! 전화를 받았다.

“...목사님이세요? 저 한겨레 이지국장입니다. 오늘 우리 아기 돌인데요... (어쩌구 저쩌구)... 김교수도 오시고 아무개도 오시구... (어쩌구 저쩌구)... 아무데 부패루 꼭 나오셔야겠습니다!”

난 안간다! 난 다른 곳에 신경을 쏟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한시간이 지났다. 나는 내게 얘기했다. 축의금도 없구, 차비두 없구, 옷도 마땅치 않구... 그러다가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오라고 한 부페에 전화를 걸어 이지국장을 바꿔달라고 했다.

“... 지금도 김교수랑 아직 있어?”

“뭐 하시는 거에요? 우리 애기 돌인데 안오실 수가 있어요?”

‘남의 사정은 모르고 더럽게 큰소리치네!’ 그러면서 나는 촌음을 아껴 옷을 갈아입고 이빨도 대강대강 닦고 택시를 집어타고(꾼 돈으로) 총알 같이 그 부페로 달려갔다.

아아 그날 나는 이지국장, 한의원의사 박선생, 치과의사 김모씨, 사업을 하는 아무개 등과 3차까지 갔지 뭐냐.


[민들레별곡 / 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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