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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민들레별곡

사랑, 사랑 내 사랑아!

by 천 지 인 2007. 1. 26.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속셈학원 원장인 장씨는 성격이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그리고 아주 급하다. 우리 몇명은 아예 불칼이라고 부른다. 경우에 맞지 않거나 밸이 꼴리는 일을 보면 도무지 참질 못한다. 성질이 그 모양이니 설흔 여섯 그 나이까지 장가를 못갔다.

그러나 장씨의 진짜 인간성은 눈물 많고 인정 많고 한없이 여리디 여린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그 잘난 속셈학원 하면서 이녀석 저녀석 이 계집아 저 계집아 돈 없고 딱한 사정있는 아이들은 모조리 공짜로 해주니 그놈의 학원 운영이 어떻게 될지 눈에 훤한 일이다.

학원 건물 월세가 몇달째 밀려 나가라 들어와라 수모를 당하니 그거 해결하느라고 끙끙거리면서도 술 한 잔만 마셔도 남들이 내는 것을 그냥 보고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먼저 일어나 주머니 탈탈 털어 지가 내놓고 나야 맘을 놓는 사람이다.

아무리 개떡같은(?) 학원이라지만 학원 하나 운영하려면 건물세에 시설비에 선생님들 월급에 아이들 실어 나르는 봉고차 운영비에 솔찮게 돈이 들어가는 법이다.

인근의 다른 번듯한 학원에서는 큼직큼직하게 시설을 해놓고 요란하게 광고를 해대고 아주 상업적 기업적으로 학생들을 끌어들이는데 이건 시설이나 선생님들 실력수준이나(월급을 제 때 많이 줘야 좋은 선생님도 모시지)그런 학원들과는 경쟁도 안되니 기껏 들락거리는 학생들이라랴 우리동네 고만고만한 형편의 아이들뿐이다. 오죽 학원 운영이 어려웠으면 학생들 실어 나르는 낡은 봉고차 운전수 하나 못두고 원장인(그래도 명색이 원장인데) 장씨가 직접 몰고 다닌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학원 운영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다른 데 있다. 빤질빤질하게 그러면서도 삐딱하게 고도로 발달된 이 한국 자본주의사회 속에서 장선생이 노상 되뇌이는 인간성회복이니 생명운동적 교육이니 자연회귀적 교육목표니 해대는 구호들이 얼마나 같잖고 얼빠진 시대착오적 구호냐 말이다. 웃기지도 않는 그 교육적 신념을 술 한잔 마시면서 괜히 핏대까지 올려가며 떠들면 사람들은 얼마쯤 들어주는 척하다가 이윽고 지겨워하면서 슬슬 자리들을 떠 버린다. 뭐 대주고 빰 맞는다고 기껏 지돈 들여 술까지 사주고 결국은 미친놈! 한심한 인간! 취급받는 것으로 끝나는 장선생 장씨의 요즘 인생이다.

대학이 취직시험 결혼시험 예비학원처럼 변해 버렸고 중학교 고등학교는 대학 입시학원으로 전락해버렸고 국민학교는 영악하고 이악스런 인간성 만드는 예비훈련장으로 변해버린 요즘의 교육현장 속에서 그래 그 잘난 속셈학원 하나 - 그것도 오늘 닫을지 내일 닫을지 풍전등화 같은 현실 속에서- 만들어 놓고 생명이 어쩌니 인간성회복 어쩌구 외쳐대니 돈이 제일이라고 확신하며 사는 이 시대 인생들이 어디 귀나 기울일 문제냐 말이다.

그러니 그놈의 학원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잘될 리가 만무한 노릇 아니겠는가. 그래 그런지 술 한잔 마시면 확 위해버리는 장선생의 눈이 겉으로 드러난 그 신념이나 용기하고는 전혀 딴판으로 노상 외로워 보이고 쓸쓸해 보인다.


그런 장선생이 요즘 살판이 났다.

꼬질꼬질한 노총각 신세에 별볼일 없는 학원원장으로 술타령이나 하다 마감할 인생인 줄 알았던 장선생에게 드디어 아가씨가 생겼다. 기가 막혀라... 젊고 팔팔한 선생들은 월급이 제대로 안 나오고 원장이라는 작자가 노상 고리타분한 설교나 늘어노니 툭하면 다른 학원으로 옮겨간다. 그래 이번에도 선생님 하나를 급히 구해야 했다. 이번에는 생활정보지에 광고도 안냈는데 어떻게 알고 경험 많고 이해심 많은 여선생님 한분이 스스로 찾아왔단다.

근데 첫눈에 딱 보니 이건 숨이 칵 막힐 만큼 절세의 미인이 아닌가. 늘씬한 키에 큰 눈망울에 휘날리는 긴머리에 고운 목소리에... 아이고! 우리 장선생은 정신이 몽롱해지고 다리의 힘이 쭉 빠져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단다.

한참 후 간신히 정신을 차려 어떻게 알구 왔느냐, 어디서 있었느냐, 나이는 얼마구, 어디에 사느냐... 글쎄 나이는 설흔 하나(장선생과 딱 맞지 뭐냐!) 아무리 알아주지 않는 속셈학원 선생이라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 정말 교육다운 교육을 시키고 싶었는데 오늘날 한국 학원교육의 현실이 정말 절망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원장님의 소문을 듣고 이런 분과 함께 일하고 싶었다.(아이고 얼마나 황홀했을까!) 난 평생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그런 말을 듣고 이 여자를 놓치지 않겠다고 작심을 했단다) 아직 미혼이고 진정한 교육적 신념을 가진 배필을 못 만나서 그랬단다. 근데 글쎄 그 순간에 너무나 감격에 겨운 이 주착바가지 노총각 원장이 여선생의 손을 갑자기 움켜쥐고는

여보! 동...!

그랬지 뭐냐. 여보! 동...이라니? 그게 얼핏 잘못 들으면 장가간 놈 마누라 부르는 여보~! 소리 아닌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버린 여선생이 노려보는데...

아! 이젠 다 틀렸구나.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건 죽음뿐이다.

절망에 빠진 장선생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총각이세요?”

여선생의 청아한 목소리.

“그렇소! 동지!”

이판사판인 장선생의 비장한 목소리.

이번에는 제대로 발음했다. 그러나 공연히 터무니 없이 큰소리에 자신이 움찔 놀랠 정도였다. 그러자 여선생이 생긋 웃으며 그랬다지 뭔가.

“저를 써주시겠다고 결정하셨으면 점심이나 사 주시지요.”

점심이 문제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얼굴색부터 달라지고 표정부터 변하는가 보다. 지가 아무리 인간성회복을 외치고 생명이 어쩌니 운운해도 바로 엊그제만 해도 맨날 후줄근 검으죽죽한 쌍판에 한국교육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는 다 짊어진 놈마냥 노상 찡그리고 앙그리고...

그러니 그 정신이야 좋다하더라도 그 인간 만나면 영 내 기분도 어두워지는 것같고 덩달아 우울하고 찝찝하고... 여하튼 될 일도 안될 것같은 분위기 일색이었는데 글쎄 미쓰리 선생과 죽자살자(정말 못 봐줄 지경이다) 연애를 시작하더니 글쎄 얼굴은 태양처럼 환해지고 얼굴엔 노상 희죽희죽 흐흐히히 웃음이 끊이지 않고 걸음걸이며 말투며 활달해지고...

그러니 누가봐도 기분좋고 믿음직스러워져 여기저기 이사람 저사람이 학생들을 소개해 자꾸 보내니 신바람에 살바람 난 것은 오직 장선생뿐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세상에 믿을놈 하나도 없다고 글쎄 이 인간이 툭하면 찾아와 싫다고 싫다고 사정해도 막무가내로 한잔술만 마셔달라고 애걸에 복걸을 해대더니만 사랑에 빠지고 나선 얼굴조차 넘석도 안한다. 어쩌다 마주쳐 장형 술 한잔 할까? 물으면 아쭈 지가 언제부터....

“형님도 언제가지 술독에 빠져 헤메고 있을 거요? 사람이 그 나이 되면 정신을 차릴 줄도 알아야지!”

그리고는 그 빌어먹을 인간이 한마디를 꼭 덧붙인다.

“형수를 사랑하시라구요! 사랑하기도 바쁜 판에 술 마실 시간이 어딨어요?”

이쯤되면 왠만한 나도 기가 막히고 콧구멍이 다 막힌다.

 

[민들레별곡 / 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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