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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민들레별곡

이씨 아저씨, 화이팅이올시다!

by 천 지 인 2007. 1. 24.
 

이씨 아저씨, 화이팅이올시다!


이른 아침 대여섯시쯤 앞마당에 나가 있으면 영락없이 이씨 노인이 보인다. 다리 위를 꾸부정 허리를 숙이고 오락가락 한다. 도무지 심심하고 무료해서 못견뎌 하는 --영락없는 그런 모습이다. 연세라야 지금 예순셋이니 요즘 세상엔 아직 팔팔한 청춘이다. 그런데도 이웃의 칠십 넘은 선배들 보다 몇년 더 늙어 보인다.

“어르신 일찍 나오셨네요?”

“강씨 오늘두 워디 가나?”

우리 아침 인사는 노상 그 모양이다. 그리고는 개울 옆켠에(그 요상한 냄새를 맡아가며) 쪼그리고 앉아 잇속없고 대책없는 얘기들이나 주고 받는다.

“요즘도 그렇게 약주 많이 드세요?”

“에이... 다리 힘이 다 빠져서 이젠 쏘주 반병만 먹어두 자꾸 쓰러진다니까...”

“그럼 웬만허면 끊으시지요...”

“사둔 남말 허지 말구 강씨나 끊으라구.”

“내야 아직은 젊은 놈이니까...”

“젊은 거 믿지 말구... 술에 장사읎다구. 내두 천하 짊어지구서라두 술사양은 안한다구 큰소리 탕탕 치믄서 마셔댄 게 엊그제여, 세월 눈 깜박허니까 육십 넘은 거여.”

“술 그렇게 잡수시고 쓰러지시고 그러면 아주머님께 구박 받으시겄네요...”

“아. 그 염병헐 것이 노상 싸가지 읎는 잔소리만 늘어놔쌌구... 이젠 아예 나가 뒈지랴...”

“저런! 큰일이시네 작은 마나님 읃을 힘두 읎으실텐데...”

“그런 소리덜 말어... 이래뵈도 가운데 그거 심은 아적 펄펄허다구... 사내놈은 볏단 하나 들어 올릴 심만 있어두 그짓은 너끈히 헌다잖여, 낸 아적두 벼 한가마닌 들어올릴 수 있다 이거여.”

“그 참, 남자들은 늙으나 젊으나 그거 얘기 나오면 왜 그렇게 거짓말이 쎈지 몰라.”

“아니... 강씨 내를 워치게 보구 고러는 거여? 그럼 내허구 목간통에 가볼겨?”

“일 읎구요, 그럼 노인정에 가셔서 예쁜 할머니라두 꼬셔보시지 그러세요?”

“... 노인정엔 아무놈이나 가남. 돈 읎쓰면 오나가나 구박덩어리여. 드러워서 못 간다구.”


노인정이 돈드는 데고 돈 없으면 눈치나 보다 풀죽어 돌아오는 데라는 소린 아버지 살아계실 때부터 들어온 소리다. 소작농 아버지는 노인정 가실 때 국수 내기 민화투값 50원이 없으셔서 노상 툴툴 거리셨고 텔리비니 라디오도 없던 시절에 긴긴밤 너무 심심하고 무료하셔서 공연히 바깥을 들락거리시다가는 느닷없이 어머니에게 화를 내시던가 순하디 순한 토종 똥개 복술이를 걷어 차시곤 했다. 그 세월이 벌써 20년 넘었다. 그런데도 노인정 속풍경 얘기를 들으면 그제나 이제나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이씨 노인도 여지없이 전라도에서 코딱지만한 땅뙈기 부쳐먹다가 그거 맨날 붙들고 있어봐야 수 없는 줄 알고 이곳으로 이사왔다.

당신 말마따나 낫놓고 기역자도 몰랐던 까막눈이라 그 당시 와이로(뇌물) 써 가지고 들어간 데가 구청 청소부 자리였단다. 꼭두 새벽부터 리어커 끌고 남의 집 쓰레기 치우는 주제에... 그래도 전라도에서 같이 올라온 또래들 중에는 제일 출세한 축에 들었다고(지금도 옛날에 뭐했느냐고 물으면 구청 다녔다고 큰소리다) 그거 유세하느라 날이면 날마다 술 먹는 게 일이었단다.

바로 몇년전까지만 해도 좀 산다 싶은 집은 청소원이나 집배원들에게 쏘주잔 한잔이라도 권하는 게 뭐, 잘사는 유세 겉기도 한 세월도 있어서 이 집 저 집 이 골목 저골목에서 한잔씩 따라주는 술로 낮이고 밤이고 날이면 날마다 쏘주에 쩔어 지냈단다. 그러니 먹기를 잘했겠나 편히 쉴 여유가 있었겠나 -- 청소부 25년에 망친 건 몸뚱이고 남은 건 알콜중독에 욕쟁이 별명밖에 안남더란다.

그렇게 죽자살자 자식새끼들 키워 공부시키고 장가 시집 보내놓으니... 이젠 자식새끼들이고 여편네고 술주정이나 해댄다고 아예 상대도 안해주고 어른 대접도 안해준단다. 그래 맘이라도 되잡을 량으로 노인정 출입을 했는데... 거기 무슨 회비니 친목계비니 먹기내기 화투값이니... 들어가는 돈이 솔찮고 가끔 돈있는 영감탱이들이 한 턱 쓴다고 큰소리 탕탕치며 ‘조여사네 골목집’으로 몰려갈 때는, 얻어먹는 것도 한두번이지 일년 내내 얻어먹기도 미안하고 영감탱이 할망구들이 그거  한턱 얻어 먹는다고 헤헤호호 간드러진 애교에 속뵈는 알랑방구 뀌어대는 게 눈꼴시려 노인정 발길 끊어 버렸단다.


“그럼 하루종일 심심해서 어떻게 견디시나...”

“아이구 증말 심심혀서 죽겄다니까.”

“테레비나 보시구 그러시지요...”

“그 육실헐 놈의 새끼들이 테레비 하나 노인들 보라구 맨긴 게 있나? 드런 시상이여. 늙으면 아무것도 헐 일이 읎다니께... 그저 돈이 젤이여. 돈푼이락두 있어야 심심헌 거 좀 면허기라두 헌다니께.”

“백마장입구 무도회관이나 가끔 나가 보시지요.”

“익은밥 먹구 고따우 신소리는 허지덜 말어, 거그 모이는 놈덜 생각만해도 내 당장 요절을 내버리구 싶다니께--.”

우리 동네 근처에 이른바 ‘무도회관’이란 게 있다. 딱 까놓고 애기하면 남녀 어울려 춤추는 데다. 도시의 노인어른들이 마땅히 즐길 ‘대중문화, 노인문화’가 없어 기껏 노인정에 앉아 고스톱판이나 벌리는 형편이니 그래저래 노인정 분위기 망치겠고 또 정부내 어떤 위인의 발상대로라면 노인들도 좀 쎄련되게, 고급문화를 맛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만들어 논 게 무도회관이다. 한말로 남녀 노인, 할아버지 할머니들 땐스장이다.

첨 발상은 그럴듯한거 같지만 그 속내용을 들어 보면 황당무계하고 귓구멍 콧구멍이 다 막힌다. 입장료를 받는다. 남자는 일인당 천원, 여자는 일인당 삼천원이다. 입장료를 이렇게 책정한 발상부터가 아주 고약하다. 까놓고 얘기하면 남자 끌어 안고 춤추려고 안달하는 여인네들이 수두룩 하니 돈 더 내야 된다 이거다. 여성상위는 여성상위인데 퇴폐적이고 착취적이다.

시간은 오후 5시까지다. 시간은 자기들 말로는 칼같이 지킨단다. 발 디딜 틈새도 없다. 물론 노인분들도 계신다. 그러나 요새 시대 기준으로 보면 아주 새파란 “젊은 노인 ”들이다. 역시 새파란 멋쟁이 할머니들도 대여섯명 정도 춤 한번 추어줄 파트너를 애타게 기다리며 앉아 있다. 아무리 잘 봐줘도 열명은 안넘는다. 그 나머지는 (들은 얘긴데) 시장바구니 들고와 숨겨놓고 춤추다 돌아가는 중년 부인, 수상쩍은 몰골의 그 또래 사내들이다.

당최 산만해서 정신이 없다. 로멘스 그레이의 점잖은(고급스런?)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고 꽹가리와 징소리 어우러 한바탕 신바람 나게 휘돌아 가는 그야말로 이땅 노인들에게 딱 어울리는 노인대중문화는 코빼기도 안 비친다. 뭔가 메슥메슥하고 음모적이고 수상쩍은 퇴폐냄새만이 진동한다.

홀 구석의 매점에서는 적어도 만원 이상 들여야 한 잔 할 수 있다. 거기도 돈 없으면 사람대접 못받는단다. 정부에서 노인들을 위해 (그것도 배려해서 마련해줬다는) 만든 문화마당이란 게 그 따위다. 노인문화 얘기를 한번 쓰자고 취재차(?) 그곳에 들렸다가 그 꼬라지를 보고는 화를 내며 나오고 말았다. 뭐 하자는 수작들이야!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뚝방에서 판넬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데 송씨가 찾아 왔다. 무도회관에서 이씨가 꺵판을 부리고 있으니 같이 가잔다. 그래 몇몇이 몰려들 갔다. 술이 곤드레가된 이씨가 무도회관 춤추는 마루홀에 벌러덩 누워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이 씨부랄 년놈덜아 이몸이 보아하니 기집덜은 멀쩡헌 남편에 대가리 다 큰 애새끼덜이 버젖이 있고 사내새끼덜 또한 여시겉은 여편네에 토끼겉은 새끼덜이 줄줄이 있는 것이 분명허다! 그란디 지 남편 지 기집 놔두구 날이면 날마다 여그에 몰려와 젖탱이와 좆뿌리를 살랑거리며 두년놈이 끌어안고 쌕쌕거리는 이유가 도데체 뭐시다냐?!날밤을 세우면서 --- 쌍코피 터지도록 입에 단내가 나도록 그 짖이 그리우면 느그덜 남편이나 기집을 데리구 뒹굴 것이지 이동네 할마씨 할배덜 점잔케 놀라고 맨길어준  요그에서 뭔 육갑지랄에 음란법석이다냐!”

(아마도)거기서 질서요원으로 데리고 있을법한 어께같은 젊은놈 둘이 이씨를 번쩍 들어 밖으로 옮기려하니 평소엔 겁보에 겁보인 송씨가 팔을 걷어 부치고 앞으로 나섰다.

“이봐! 법대루 해보자구 ---경찰을 부를 테니까 경찰에 넘기든지 --그러자 이거야!”

그러니 거기 모인 선남선녀들이 경찰을 부른다는 말에 모조리 줄행랑을 처버렸다. 삼십육계를 안치고 있다가 집안에 알려지기라도 해봐라. 그러니 술에 곤죽이 되어 정신을 못가누면서도 이씨는 더욱 기고만장이다.

“--여그 사장이 누구여? 이게 노인덜 모여 즐겁게 지내라구 맨길어 논건데 언놈이 --요렇게 허가를 내준거여? 내두 한때는 지방공무원으로 있었으니께 법에 대해서는 알만큼 알구 있다 이거야! 누구야 구청장이여 국회의원이여? 어느놈이구 불법으루 요렇게 했다허믄 아주 요절을 낼 것인즉 --”

오금이 저려버린 주인인지 책임자인지가 찾아와 싹싹 빌고 통사정을 하고 --그 난리를 쳐대고서 이씨는 결국 술을 못이기고 제풀에 쓰러져 버렸다. 역시 주인인지 책임자인지가 반강제적으로 넣어주는 이차 약주값은 송씨가 받았다던가?

 어쨌거나 이씨 아저씨--- 파이팅일시다.


[민들레별곡 / 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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