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버리는 지혜
.... 고난의 길을 뚫고 가려면 간편한 몸차림을 하라는 가르침인가요? 해마다 낙엽을 보며 또 엄동에 까맣게 언 솔잎을 보며 느끼는 일입니다. 참삶이란 부단히 버리고 끝끝내 지키는 일의 통일처럼 느껴집니다. 신진대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생명의 운행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가을의 낙엽에서는 버림, 청산을 결행하고, 겨울의 얼어붙은 솔잎에서는 극한의 역경에서도 끝내 지켜야 할 것은 지키라는 것을 온몸으로 가르침을 배운다고 여기면서도, 그게 쉽지 않고 버리기도 지키기도 힘들다는 점만을 알 따름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정쩡하게 목숨만 이어 갑니다.
버릴 줄 알아야 지킬 줄 알겠는데 버리지 못하니까 지키지 못합니다. 느티나무는 가을에 낙엽 진 다음 해마다 봄이 되면 새 잎을 피울 뿐만 아니라 껍질도 벗습니다. 누에를 쳐 보니 다섯 번 잠을 자고 다섯 번 허물을 벗은 다음 고치를 짓습니다. 탈피 탈각 없이는 생명의 성장과 성취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탈피 탈각을 하지 못하면 주검이겠지요....
단풍과 지는 해가 산천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것을 보면서 때때로 인생의 마지막을 저렇게 멋지게 마치진 못할망정 추접게 마치지는 말아야 하는데 하고 느낍니다. 사실 마지막이란 일상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거지 어디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게 아닐진대 삶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끝마침도 제대로 이루어지겠지요.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건 자연의 운행과 역사의 과제에 충실한 삶을 사는 건데, 세상의 흐름은 자연과 멀어지고 역사보다는 순간과 개인적인 삶으로 오그라드는 것 같습니다 ....
2. 아낌의 정신
.... 집에서 신는 구두는 동리 쓰레기터에서 주워다 뒤축을 수선한 겁니다. 안동이나 영주쯤 갈 때는 신고 갑니다. 아주 야무지고 단단해서 수선하는 아저씨도 좋은 신 주웠다고 부러워하면서, 요즘은 수선해서 신는 사람도 드물고 수선일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고 한심스러워 합디다.
이번 추위 때 입은 멋진 오리털 잠바는 서울 있는 친구가 그의 집 앞에서 주웠다며 준 건데, 빨래를 깨끗하게 해서 버린 걸 보면 제법 알뜰한 사람 같아요. 형도 알다시피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밥도 하고 설거지랑 빨래도 합니다. 물을 길어다 쓰니까 한 방울의 물도 아껴 쓰게 돼요. 날마다 몇 번씩 쓰는 물을 아껴 쓰는 게 몸에 배니까 자연히 딴 물건도 아껴 쓰게 돼요.
이건 비단 나만이 아닐겁니다. 누구나 물을 길어 쓰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지요. 어쩌다 읍에서 수도물 쓰던 젊은이들이 와서 물 쓰는 걸 보면 나보다 한 열 배쯤 더 써요. 아까운 줄 모르는 게 확실해요. 글자가 생기자 인간의 기억력이 약해졌듯이 꼭지만 틀면 쏴 쏟아지는 수도가 생긴 다음부터 낭비가 시작된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른바 발전이라는 것이 그와 맞먹는 후퇴를 안겨 주고 있지 않을까요? 인색해서는 안 되지만 절약은 해야죠.
물건을 아낀다는 건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자 자연에 대한 외경심이며 고마움의 표시라고 여겨요. 낭비는 대상을 함부로 다루는 성실하지 못한 마음가짐과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물건을 소중하게 대하는 태도가 이어져서 국토와 이웃, 자기 자신까지도 소중하게 가꿀 수 있다고 봅니다.
낭비하고 함부로 버리는 버릇이 마침내 이웃도, 고향도, 심하면 자신의 인간성까지 버리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합니다. 사람이란 별 것 아닌 것 같아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물건을 어떻게 만나고 다루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됨이 이루어지겠지요 ....
3. 집이 나도록
.... 벽을 바르고 벽돌 찍고 마당 수조를 하려고 일 년에 한두 번쯤은 진흙을 이깁니다. 흙을 대강 이겨 벽을 바르고 벽돌을 찍어 봤더니 모양은 아무 이상이 없는데 자꾸 떨어지고 갈라져 버립디다.
좀더 이겨 발랐더니 그런 대로 붙어 있긴 하는데 며칠이 지나니까 펄렁거려요. 새로 바른 것이 전에 있던 것과 따로 놀아요. 에라 삼세판이라고 이번에는 흙에 집이 나도록 이리 뒤지고 저리 뒤져 가며 이겼습니다. 집이 나니까 완전히 한덩어리가 되고 마른 벽에 붙는 힘도 좋아졌는지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아요
흙도 메주도 집이 나도록 이기고 찧어야 엉겨 떨어지지 않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고장에서는 아해들이 어울려 신나게 노는 것을 “야! 그놈들 집지게 논다”고 합니다 .....
집이 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회의만 자주 하고 논쟁만 일삼는 것이 이기기만 하고 바르지 않는 것같이 느껴져요. 사람들이 와서 모였다 뿔뿔이 헤어지는 것은 그들 사이에 집이 나지 않았던 까닭처럼 느껴져요.
진짜 모임은 이기는 과정에서 집이 나야 하고, 집이 나면 발라야 하는데도 계속 뒤집어 이기기만 하면 그대로 굳어 버려요. 집이 나도록 이겨진 흙은 대상에 발라져서 대상과 한덩이가 되어 새롭거나 완전한 물체로 거듭납니다 ....
4. 됨됨이
.... 밥그릇 국그릇이 뒹굴고 있는 부엌, 뒷설거지를 하지 않는 논밭을 보면 그 집 안주인과 농군들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음식 솜씨는 상차림에 나타나지만 인간의 됨됨이는 설거지에 나타납니다 ....
안동의 놀이패 방에 붙은 구호보다도 거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 풍겨나는 생활태도가 사람들에게 영향도 주고 평가도 내리게 하겠지요. 피로 쓴 절규도 세월과 더불어 빛이 바래는데 먹으로 쓴 구호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 리는 없겠지요. 그걸 보고 감동할 천진난만한 사람들은 이 살벌한 땅에서 사라진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
[저자 : 전우익]
아호는 무명씨를 뜻하는 '언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일꾼'을 뜻하는 '피정(皮丁)'.
1925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중동중학을 졸업한 뒤 경성제국대학을 중퇴.
1947년 좌익 계열의 민청에서 반(反)제국주의 청년운동을 하다, 6·25전쟁 후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룸.
이후 연좌제와 보호관찰 처분을 받아 자유롭지 못한 신분이 되자 낙향하여 한평생을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2004년 12월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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