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는 것을 두려워 하랴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백기완 지음, 백산서당)
1.
생계를 꾸린답시고 몇 평 되지 않는 공간에 나를 묶어 둔지도 벌써 6개월째다. 집과 일터를 오가면서 살다보니 여행은 커녕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힘들다. 그래서인지 배낭 메고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부러울 뿐이다.
때문에 서점이나 극장에 가는 것도 이제는 큰 맘 먹고 움직여야 한다. 그것도 수면 시간을 쪼개서 오전에 움직여야 하니 몸을 움직이기가 도무지 힘들다. 그러다 얼마 전에 시간을 내어 서점에 갔다.
책구경을 하면서 눈요기라도 할 마음으로, 그러다가 혹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구입할 생각으로 말이다. 이 책 저 책 만지면서 돌아다니던 나의 눈을 사로잡는 한 권의 책이 있기에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곧바로 계산대로 갔다.
“..... 의리가 있어야지 .....”
이것이 내가 책을 구입한 이유였다. 이 책은 출판이 되기 전부터 예매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특이함 때문에 제도언론에서까지 기사화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사를 읽을 때마다 “입금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번번이 잊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서점에서 그 책을 발견한 것이다. “나부터 읽지 않으면 누가 사서 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주저 없이 책을 구입한 것이다.
그렇다. 구입의 동기는 의리였다. 그렇게 구입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내가 느낀 것은 두 가지이다. 인생의 다양한 주제를 특유의 입담으로 풀어 헤쳤으니 우선은 읽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60 평생을 통일꾼으로서 굽힘없이 살아온 인생 이야기이니 때때로 나태해지는 서른 중반의 나를 부끄럽게 깨우쳐 준다.
2.
한 발자욱만
한 발자욱만 더
밀어 내보다가 죽어도 죽자.
한 발자욱이 안되면
단 한치, 단 한치만이라도
더 밀어 내보다가 쓰러져도 쓰러지자.
아, 어이타 이놈의 세상은
밀어낼수록 더 캄캄한 수렁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는다는 건
패배보다 더 끔찍한 과거라
밤이사 칭칭 드세지만
한 발자욱만 더
한 발자욱만 더
평생의 땀과 체취가 흠씬 묻어나는 ‘통일문제연구소’를 재정난으로 닫아야 했을 때, 백 선생님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단지 미루어 짐작해 볼 따름이다. 하지만 “한 발자욱 만 더 아니면 단 한치만이라도 밀어 내는” 마음으로 순간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바위처럼 버티는 의지는 삶의 귀감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공평하지도 않으며 정의롭지도 않다. 부패와 독점, 불균등과 부조리, 돈, 횡포, 학살, 만행 등으로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타락한 현실을 용인하는 현상론 그리고 그 현상에 빌붙는 기회주의, 변절을 변화와 발전으로 치는 뒤집힌 가치관 등이 판을 친다는 사실이다. 정의는 무능으로, 지조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음으로, 원칙은 교조로 취급당한다.
투쟁의 시대에 자신을 뜨겁게 불태웠던 사람들은 거리에서 철수하는 순간부터 역사의 주연에서 밀려나기 시작한다. 이들의 치열한 투쟁으로 넓혀진 사회공간을 속칭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점령한다. 그리고 이들은 ‘변화를 수용하라’고 떠들어댄다.
평생 동안 통일운동에 자신을 내던진 사람은 방북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첨병 노릇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은 소떼를 몰고 북에 다녀 왔다. 보다 많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노동자들에게 식칼테러도 불사하던 그가 남북에서 영웅이 되었다.
3.
구구한 말이 필요없다. 평생을 운동가로써, 실천의 선두에서 살아 왔던 삶을 정리한 책이기에 난해하지 않다. 그렇다고 시시콜콜 가르치려는 설교투의 글도 아니다.
백 선생님 특유의 구수한 입담이 담긴 재미있는 이야기책이다. 그러나 읽으면서 쉽게 지나칠 수가 없다. 우정에 대해서, 소유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역사와 민족에 대해서 그리고 지조와 절개에 대해서 풀어헤친 글을 대하면 숙연해질 뿐이다.
짜증이 날수록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을 때,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바위처럼 자기를 가꾸려할 때, 꼿꼿한 선배로부터 인생의 깊은 맛을 듣고 싶을 때 일독을 권한다.
거센 물살을 거스르자고 하면 흠뻑 젖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노선배의 깨우침을 새겨본다. 피눈물에 젖기를 거부하고, 역사의 아픔에 젖기를 거부하고, 오로지 마른자리만 찾아가려는 간악한 지혜와 잔꾀, 그것의 본질은 속임수와 침탈, 착취와 범죄와 폭력주의, 반자연주의라는 나름의 해석 또한 새겨야 할 내용이다.
재물에 대한 집착, 심지어는 그렇게도 애틋한 사랑에 대한 집착으로부터도 스스로를 놓는 자기해방의 세계, 천지개벽 같은 자유정신 - 이것은 어느 역사 단계의 시대정신이 아니라 숱한 역사의 굽이를 일관 짓는 보편적인 인간상이라는 정의도 좋은 가르침이다.
남김없이 내주고 거침없이 살아가는 하룻밤 풋사랑처럼 일생을 몰아서 한판에 살라버리는 통큰 인간형, 속물주의의 째째함을 찢어 발기고 남김없이 주고 남김없이 살아가는 넉넉함을 읽으면서 나 또한 넓어졌다는 착각 내지는 대리만족은 배설의 기쁨만큼이나 순간적인 것이지만 짜릿하다.
우여곡절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당당해야 한다. 서로를 지켜 주는 동지들의 따뜻한 눈빛이 있는 한 우리는 주변에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하기에 “일편단심 두 글자만 믿고서 살아간다”는 백선생님의 단순함은 역설적으로 ‘진보적인 삶’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렇다. 긴 안목으로 역사를 조망하면서 순간순간의 변화에 대한 행간을 읽어 간다면 “정의가 무능으로, 지조가 낡음으로, 원칙이 교조”로 바꿔치기 당하지 않는다. “변절자가 변화의 전도사로, 착취자가 영웅으로, 출세주의자가 참신한 인물로” 뒤집히는 현실을 조롱하면서 우리는 오히려 당당할 수 있다. “절망,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이기에!
[1999년 9월 / ‘사람과 사람들’ 투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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