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농사
이번 일요일도 역시 화창한 봄날씨다.
노상 설쳐대고 수다스럽기 그지없는 조씨는 아침부터 집집마다 들쑤셔대며 선동을 해대느라 여념이 없다.
“오늘은 뭔 껀수남?"
마지못해 끌려나온 내가 물었더니 느닷없이 나를 개울가로 끌고 간다. 똥개울 옆켠엔 한 30-40여평 남직한 공터가 있고 거기 이미 정씨 형님, 김씨, 최씨 해서 너덧이 나와 있다. 다들 나처럼 황당스럽게 끌려나온 모양인지 어정대며 쓸데없는 소리들만 늘어놓고들 있었다. 거기 조씨의 일장 연설이 시작됐다.
“‧‧‧ 에‧‧‧ 우리도 이자는 노상 술이나 퍼마시구 노작거리구만 있을 때가 아닌 것인즉 ---"
그래서 우리는 무슨 대단한 얘기라도 하려나보다 잔뜩 기대를 걸고 듣고 있었다.
“냄들은 다 빌라를 짓네, 빌딩을 짓네, 밤낮읎시 불철주야 떨치구 일어스는 이때에‧‧‧ 에‧‧‧ 지하철 공사도 시작됐고 또한 우리 동네 구청 공사두 한창인 이 시점을 맞이해서‧‧‧"
성질 급한 최씨가
“거 더럽게 노가리 기네, 그러니까루 한마디루 뭔 얘기여‧‧‧?"
한마디 해대자 다들 줄줄이 한마디씩이다.
“아적 통장 바꿀 때두 안 됐는디 벌써 선거연설이여?"
“야 텔리비에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헐 시간이니깐 후딱후딱 끝내부려."
“야 기왕이믄 막걸리나 한사발씩 먹구 허자 이거여."
우기는 데는 우리 다섯명 다 덤벼도 못당해 낼 조씨는 그러거나 말거나 연설 계속이다.
“‧‧‧ 에‧‧‧ 그리하야, 우리두 이 봄날을 맞이하야 뭔가 좀‧‧‧ 보람있구 잇속 있는 사업이라두 해야되지 않겄나 해서‧‧‧ 이렇게 모이시라 헌 것인데‧‧‧"
잇속 있는 사업이라니 다들 느닷없이 조용해지면서 눈빛들이 달라지는데 조씨는 말을 착 내리 깐다.
“바로 요기다 밭을 일궈 농사를 짓자 이거여!”
다들 에이, 에이 욕들을 하고 어쩌구 저쩌구‧‧‧ 오염된 땅에 뭘 심겠느냐, 그거 먹고 암 걸리면 조가 네놈이 책임지겠느냐‧‧‧ 아마 한시간을 또 떠들고 갈팡질팡 하다가는 결국 조씨 등살에 밀려 삽들을 잡고 흙을 일구게 되었다.
두눈만 마주쳐도, 입만 뻥긋해도, 한두명 얼씬대기만 해도‧‧‧ 우선 막걸리부터 먹어야 될 거 아니냐‧‧‧ 쓸데없이 우겨대는 정씨성님이 그날도 계속 막걸리 노래를 부르기에‧‧‧ 그놈의 입이라도 막아놀 심산으로 막걸리 몇통 갖다 놓고 돌을 골라내고 울타리를 치고 흙을 파고‧‧‧ 마시고는 파고 마시고는 파고‧‧‧ 그렇게 일 같지도 않게 한 일인데도 점심 나절 조금 지나니 아주 산뜻하고 보기좋은 밭모양이 됐다.
만물박사 우리 조씨는 작업내내 졸졸 따라 다니며 흙은 깊게 파라, 흙덩이를 콩가루처럼 부드럽게 해라, 이랑은 배수가 잘되게 해라‧‧‧ 줄줄이 욕까지 얻어 먹으면서도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놔 결국 그 잔소리 때문에 그럴듯한 밭뙈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해걸음 무렵 우리는 산뜻하게 정리된 밭두렁에 앉았다. 지가 무슨 지주어른이나 된다고 돼지고기 두어근 막걸리 몇통, 자기 돈으로 사들고 온 조씨에게 한바탕 칭찬을 해주고는 번개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 가면서 자기들 농사꾼적 자랑들을 늘어놓는다.
허기야 우리들 중 농사꾼 아니었던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말들도 많다.
“농사란 자고로 맴이 착해야 되는거여, 땅은 절대루 그(거)짓말을 안한대니까.”
정씨성님이 한마디 하시자
“정직한 거하구 미련헌 거하구는 달르요, 무조건 땀만 흘리믄 농사 풍년 든답디까? 땅의 성질도 알어야허구 심그는 곡식헌티 뭔 거름을 워떻게 줘야허는지두 알어야한다 이거여, 시상에 미련곰퉁이겉은 놈덜이 자갈밭 칡밭에 앉찔러갖구 비지땀만 흘리는디 그래봤자 노상 흉년이라 이거여.”
최씨가 한말 하니 삐치기 잘하는 정씨성님은 자존심이 벌써 상하시는 판이다.
“아따 그걸 누가 몰른단가? 고런거야 기본이지‧‧‧”
“그려 맞어! 정씨성님 말씸이 맞는 거라고‧‧‧ 원 맴이 정직허지 않으믄 맨날 특용작물입네 특수작물입네 유기농법이네 노상 대갈통만 굴리믄서 농사를 뭔 장난치듯 해대는 놈덜이 있는디 그거 다 맬짱 헛거여, 우선은 기초적으루, 진실허게 끈기있게 농사꾼으루 살겄다는 정신이 있구나서 특용작물이구 유기농법이구가 있는 거지. 도시 장사꾼덜매냥 똥빡이나 굴리구 잔머리나 굴리믄 농사는 피륭(폐농)하는 거여.”
그거 참 도사 겉은 말씸이시구만, 나는 그 얘기가 참 맘에 들었다. 그러고보니 조씨는 주둥이로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인생을 아주 깊게 들여다보면서 깨우치고 산다는 느낌이 든다.
“‧‧‧맞어야, 진실하면 말여 다 들여다 보이는 뱁이여‧‧‧ 땅의 성질두 보이구, 뭔 낟알을 심어야하는 것두 보이구, 뭔 거름을 줘야 좋은지두 보인다구. 아, 옛날 어른덜 말씸에 부부간이나 부모자식간에 진실허게 사랑을 하믄 뭘 먹구 싶어하는지, 뭘 입구 싶어하는지, 뭔 말을 하구 싶어 하는지 다 안다구 안해요?”
우리는 그 냄새 진동하는 똥개울가에서 코끝에 그 요상시런 냄새 맡아가며 막걸리를 다 마시고는 밭이랑에서 일어섰다. 꼭 하고 싶은 얘기를 참다참다 혼잣말처럼 슬며시 내뱉았다.
“그나저나‧‧‧ 여긴 다 중금속에 오염된 데라 여기 심근 채소 먹으면 큰일 나요, 요새는 제일 큰 문제가 오염된 음식을 먹는 건데‧‧‧”
내 말이 채 끝나지 않아
“못먹구 안먹어서 걸린다!”
“이놈으 조선땅 오염 안 된데 있음 찾아보라 이거여.”
“강씨는 아적두 재벌 회장님츠럼 살고 잪은가벼?”
무슨 얘길 못한다니까. 그러니 저런 위인들한테 언제 차분히 앉아 맘놓고 한번 진지한 공부를 시키겄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절대 안 먹겠다고 툴툴거리며 뚝방 위로 올라오니 뭔 큰농사 져놨다고 큰형수 작은형수에 손아줌씨까지 덩달아 어울려 질펀허니 저녁 한 상을 차려 놓았지 뭐냐!
[민들레별곡 / 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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