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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민들레별곡

딸의 자존심

by 천 지 인 2007. 1. 17.
 

딸의 자존심


바깥 나들이를 하고 늦게 집에 돌아오니 큰딸아이가 입이 이만큼 나와 쫑알거리고 있었다. 눈물을 찔끔찔끔 짜가며 쫑알거리는 것을 듣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지고 답답해서 밖으로 나와 버렸다. 흐린 밤하늘 아래로 흰구름이 쏜살같이 떼지어 몰려가고 있었다.

큰딸아이는 지금 스물 다섯살이다. 항상 명랑하고 패기만만하고 돼먹지 않은 꼴을 보면 주먹까지 휘두르는 매력 있고 용기 있는 처녀다. 어린아이들 피아노를 가르치는 피아노 선생인 큰딸은 그래 친구들도 많고 이런저런 사람들과 왁자하니 친하게 지내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시집갈 생각도 않고 철부지 말괄량이로 세월 보낼 것같이 딴전만 부리던 딸아이가 금년 연애를 시작했다. 성질대로 죽자살자 불같이 사랑에 빠진 이 아이는 -내가 알기로는- 웬만한 일로는 여간해서 기죽어가며 연애를 하지 않는다. 데이트 자금이 없어 쭈삣 거린다던지 옷이나 구두가 좀 어떻다고 해서 신경을 쓰는 처녀가 아니다.

영화관에 가서 연인을 옆에 놔두고 코까지 골며 잠을 자고 나왔어도 끄떡도 않고 그놈의 영화가 워낙 재미없어서 어쩌구 뻔뻔스럽게 큰소리까지 치는 경지다. 그런 딸아이가 자존심이 단단히 상해서 쿨쩍거리는 모습을 보는 나나 아내나 마음이 좋을리 없다.


큰길에서 우리동네 들어오는 초입에는 작년 재작년 낡은 건물 헐어치고 삼사층짜리 빌딩(?)들을 지었다. 그래 초입의 양쪽 건물들은 동네 분위기와는 걸맞지 않게 제법 번듯하다. 그러나 초입의 그런 그럴듯한 건물 대여섯개만 지나오면 낡고 더럽고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형적 도시슬럼인 우리동네 본모습이 나타난다.

옆으로는 굴포천 똥개울이 온갖 악취를 뿜어내며 온통 썩은 물로 흘러가고 차도 들어갈 수 없는 작은 골목엔 얼굴이 밝지 않은 - 그늘진 얼굴들의 아이들이 모든 쌍욕을 해가며 뛰어놀고 있다. 개울뚝 작은 제방위엔 하릴없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대낮부터 술들이 곤드레가 되어 비칠거리고 있고 대개 노점상 장사꾼인 좀 젊은 아줌마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도 악다구리 끓듯 악을 써가며 싸우고들 있다.

지붕의 스레트는 오랜 세월에 아예 썩어 시커먼 색깔로 바래있고 무너지고 구멍난 담들, 벽들은 아주 천박한 색의 페인트로 대강대강 칠해져 있다. 그것도 집집마다 그 정도로 손질된 것이 아니고 열집에 한집정도쯤, 그나마 주인이 사는 집 정도가 그 정도라도 손을 보고 산다.

집이고 사람이고 주위 환경이나 풍경이나 지저분하고 더럽고 냄새나고 시끄럽고 쌍스럽고, 갈 데까지 가고 올 데까지 온 절망적인 동네가 바로 우리 동네다. 그중에서도 내가 사는 열두가구 오동나무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지 중의 상거지 양아치 중의 상양아치나 살면 딱 좋을성싶은 그야말로 거지발싸개 같은 집이다. 동네 터줏대감인 노씨 노인 말로는 한때 82명까지 살은 내력을 가진 온갖 인간군상들의 소굴이었단다.

집 바로 앞으로 소방도로가 나는 바람에 원집의 삼분지 일이 잘려 나가고 이래저래 다들 떠나버리고 지금은 여섯가구만 남아 살고 있는 우리가 사는 집은 동네에서는 아직도 열두가구집으로 불린다. 4년전 내가 오갈 데 없이 한숨만 들이쉬고 내쉬고 있을 때 이 집을 한때 소유했었던 후배의 배려(?)로 이집에 와보니 정말 볼만도 했다.

60년대나 지었음직한 집의 구조도 구조지만 벽은 수수깡을 얽어 흙 발라 만든 벽처럼 작은 나뭇조각들을 얼기설기 엮어 흙이랍시고 발랐고 그 위에 시멘트를 종잇장처럼 얇게 발랐는데 그게 다 무너져 이집 저집 이방 저방 구분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천장은 기와가 온통 삭아 천정이 곧 무너져 내릴듯한 상태라 비가 새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 목숨 부지할 수도 없는 지경이라 기와를 대강대강 걷어 내고 여기저기 쓰레기통을 뒤져 낡은 비닐이나 천막 등을 주어와 덕지덕지 씌웠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온 천정에서 물이 새 얹은 데 또 얹고 그래도 모자라 농촌에서 비닐하우스 위에 덮는 보온 덮개를 구해다 덧얹으니 우리 동네 맨 초입에 있는 이집 꼬라지 때문에 관청이고 동네고 도시미관을 해치네, 동네 개망신 시키네(자기들 집꼴은 그나마 좀 낫다고!)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다.

거기다 매해 장마 때면 제일 낮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상습적으로 물난리까지 겪어대는 판이니 아무리 집간 절간에 신경쓰지 않는 “나”라고 하지만 여기 사는 내 꼬라지가 썩 편한 것만도 아니었다.

 

딸아이 애인 녀석은 결혼도 안했는데 벌써 딸아이한테 꽉 잡혔는지 아침 여덟시만 되면 영락없이 안부전화에 하루 스케줄 보고를 해대고 저녁 퇴근 때면 허겁지겁 차를 몰고와 딸년을 집앞까지 ‘모셔다’ 놓고 돌아간다.

다른 건 대범한 딸년도 거지발싸개 같은 집꼴 보이는 건 도무지 자신이 없었던지 애인녀석을 큰길까지만 오게 하고 그 이상은 절대로 따라오지 못하게 단단히 훈련을 시켰던 모양이다. 착하디 착한 애인녀석은(아마도 -나와 아내는 한번도 본적이 없으니) 딸년의 준엄한 가르침에 고분고분 따랐던 모양으로 연애하면서 집앞까지 따라온 경우가 한번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차에서 내려주고 마침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지니까 딸아이가 인사도 안하고 냉큼 길을 건넜던 모양이다. (역시 아마도)여자에게 넋이 빠진 이 애인녀석이 딸아이가 무슨 일로 삐쳤거나 화가 단단히 나서 저렇게 냉정하게 돌아선 거라고 지레 겁을 먹고 허겁지겁 딸년을 쫓아왔던 모양이다. 

딸년은 딸년대로 자기가 철저히 훈련을 시켜놨으니 절대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무심히 집 앞까지 와서는 마당 앞 길가 평상에 앉아 있는 지 엄마와 동네 아줌마들에게 인사를 하고 한바탕 수다를 떨고 집으로 들어갔겠다.

그 모든 걸 사내녀석은 멀건히 보고 있었고 자기 집에 도착해서는 딸아이에게 어쩌구저쩌구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수화기를 집어 던지고 울고 불고 온통 난리를 쳐댄 딸아이는 무능한 아빠와 주변없는 엄마가 싫으니 집을 나가 혼자 살겠다고 우겨댔나 보다. 그 기세가 한풀 꺾일 즈음에 내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할 말이 없다.

소유의 능력이 있고 진정한 소유가 무엇인지 아는 자만이 무소유를 운운할 수 있는 것이다.

공중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나는 집도 절도 없다고 탄식하셨던 예수는 또한 역설적으로 천하가 다 내것이라고 설파하셨다. 나는 그 말을 좋아하고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 현실은 어떤가. 16평짜리 연립주택 하나 장만할 능력도 없는 천하의 무능력자이면서 무책임하게 무소유를 운운하고 있다.

이건 정말 사기다. 나는 게으르고 못난 위인일 뿐이다. 그것만이 엄연한 사실이다. 왜 이리도 마음이 아프고 슬플까.

똥개울을 타고 바람은 세차게 불어오고 밤구름은 여전히 쏜살 같이 흘러간다.

 

[민들레별곡 / 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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