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폭력과 욕설, 영화 ‘똥파리’는 가정폭력의 종합꾸러미다. 아버지는 아내를 구타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짓밟고, 오빠는 여동생에게 욕설과 주먹을 휘두른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광고문구가 있다.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 적어도 영화 똥파리에서만은 적절치 않다.
사회적 무능력자인 남자가 집에서는 가장(家長)으로서 절대권력자로 군림한다. 정글의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그들은 가정의 테두리 내에서 무소불위의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니 가족 구성원들에게는 집에 들어가는 순간 개고생의 시작이다.
가정에서 일상화된 욕설과 폭력은 구성원의 내면에 배태된다. 그리고 이는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외면화된다. 가정의 폭력이 울타리를 뛰어 넘어 타인을 상대로 확대재생산 되는 것이다.
다양한 폭력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상훈은 양아치다. 그는 조직과 부하를 거느린 폼생폼사의 건달이 아니다. 시위현장에서 학생을 때려잡고 노점상에 들이닥쳐 생활의 터전을 짓밟는 용역깡패다. 떼인 돈 받아주고 일당 받아먹는 고리사채의 수금원일 뿐이다. 기껏 그렇게 번 돈은 성인오락실에서 게임으로 탕진해 버린다.
그에게는 미래가 없다.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주어진 순간순간의 생존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집에서나 길거리에서 그리고 자신만의 생업전선에서 욕설과 폭력을 멈추고는 행동이 불가능하다. 욕설과 폭력 그 자체가 그에게는 생존의 방식이며 현실에 대한 탈출구인 셈이다.
상훈에게는 ‘게임의 법칙’ 박중훈처럼 뒷골목에서 존경받는 형님이 되고픈 출세욕도 없다. ‘초록물고기’의 한석규처럼 냉혹한 보스의 연적으로서 살 떨리는 로맨스를 전개하지도 않는다. 그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 없으며, 누구를 사랑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 누구에게 전염될지 모르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된다. 감정의 작은 흔들림은 자신의 생활양식을 바꿔 버리는 쓰나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닌텐도 게임 개발자는 말한다. “훌륭한 상품이 잘 팔리는 것이 아니라, 잘 팔리는 상품이 훌륭한 것이다”라고. 그러나 영화 똥파리는 예외다. 관객의 수요와 상관없이 사실주의의 묵직함이 가슴을 뻐근하게 만드는 간만에 만나는 훌륭한 영화다.
밤이면 밤마다 안방을 찾아오는 진부한 이야기 -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증, 백혈병 등의 소재를 비벼낸 막장드라마의 시청률이 높다고 훌륭한 상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재벌가 2세 꽃미남들과 세탁소 딸의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한 황당코믹 드라마를 시청자들이 환호한다고 해서 작품성이 배가되는건 아니다.
여과 없이 전개되는 욕설과 폭력의 리얼리티는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옆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기도 민망하다. 그러나 대중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는 작위적인 드라마보다는 영화속 욕설과 폭력이 오히려 편하다. 그렇게 내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던 영화가 막판에는 눈시울을 뜨끈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도와 안전망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는 용산참사가 단적으로 말해준다. 멀쩡히 생업에 종사하던 이들의 권리조차 제대로 보상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도심테러분자로 만들어 버린다. 부자지간이 함께 망루에 올라서 생사가 갈리는 야만이 서울 한복판에서 버젓이 전개된 것이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영화는 가난과 폭력의 악순환에 대해서 사회적 이슈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주장하지 않고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주의는 역설적으로 가난과 폭력의 근원적 지점에 대한 해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것이 바로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되 막장으로 빠지지 않는 ‘똥파리’의 강점이며, 주장하지 않되 근원을 고민하게 만드는 ‘똥파리’의 힘이다.
- 천 지 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