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바랜 앨범
이번에 책 한권 펴내고 여기저기 이름 석자 알려지고 보니 별 희한하고 신기한 일도 다 생긴다. 밤 열두시가 다 되가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으니 저쪽에서 대뜸
“야! 너 강진호 아니냐?”
어떤 미친놈이 이따위로 전화를 해대는거야 -- 그래
“나 강진호다! 당신 누구야? 강진혼지두 모르구 전화했다는 거야?” 내 얘기 따윈 신경도 안쓰고
“얌마 나 이 아무개야! 나 모르겠어?!”
순간 전광석화처럼 그 인간 이름을 기억해 보려고 해도 깜깜 무기억이다.
“ -- 잘 -- 모르겄는데 -- ” 그러니까 대뜸 또
“얌마! 너 연천에서 연천중학교 안 나왔어?“ 그런다.
“ -- 그래 -- 거기 나왔는데 -- 누구지?”
“나 너하구 같은 반이었잖아! 나는 앞에서 두번째 줄에 앉았구 너는 뒤에서 두번째 앉았잖아 -- 나는 아무개허구 짝이었구 너는 누구허구 -- 어쩌구 저쩌구 -- ”
그렇게 한참을 설명하고 해명하고 나니 그제야 희미하게 그놈이 누구란 걸 알 거 같았다. 왈칵 반가움이 치밀어
“맞다! 맞어! 아 이제야 기억이 난다! 너는 그 때 키가 작았구 공부 잘 하구 얌전하구 -- 어쩌구 저쩌구 -- ”
우리는 수다쟁이 여편네들(또 씹힐라!)처럼 요란스럽게 한시간쯤 게거품을 뿜어대며 떠들어 대다가 요즘 뭐허냐, 사는 건 어떠냐, 아이는 -- 그리고 남들 또한 그러듯이 당장 만나자!로 끝났다. 전화를 끊기전 근데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냐 물었더니 자기가 경기도 어디 시청에서 공보계장으로 근무하는데 그래 이런 저런 신문들을 자주 보게 되고 네 얘기가 나와서 첨에는 관심없이 대강대강 보았는데 연천 임진강 얘기가 나오고 이 자식이 아닐까 그래서 신문사에 전화해 담당기자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달래서 걸어봤는데 과연 너였구나 --.
그리고 이틀 후 우리는 태릉쪽에서 신발가게를 하고 있는 또 다른 동창 정아무개집 앞에서 만났다. 우선은 서울이나 서울근교에 살고 있는 오기 편하고 시간 낼 수 있는 동창들 예늴곱이 이미 다들 와 있었다. 이게 몇 년 만인가 -- 어언 삼십년만에 정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감개가 무량하고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는 우루르 왁작지껄 근처 갈비집으로 몰려들 갔다. 자리에 앉고 한명한명 살펴보니 처자식 보살피며 세상에 시달리며 이런저런 고달픔에 주름진 세월의 흔적은 있어도 본바탕은 옛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이놈 저놈 이자식 저자식 이새끼 저새끼 순 욕으로 시작해서 그 시절의 험담 비밀 실수 등을 까발기면서 배꼽을 잡고 웃어대고 뒹굴고 때리고 해가면서 일차를 끝냈다. 돈깨나 번다는 김아무개가 이차를 가자! 외치니 동창회장을 십년동안 틀어쥐고 있었다는 이아무개가 진호는 우리와 헤어져 이번에 처음 만난 것이니 동창들 현황을 “브리핑”해주고 이차를 가자고 우겨 나는 “숙연한”마음으로 앉아 그의 브리핑을 기다렸다. 그가 누런 서류봉투에서 앨범을 꺼냈다. 귀퉁이가 다 떨어지고 학교이름이 거의 지워진 중학교 졸업앨범이었다. 첫장을 넘기니 교가가 나타난다.
임진강 바라보며 이곳 연천에 -- 우리는 함께 교가를 불렀다. 가사도 잘 기억나지 않고 곡도 뒤죽박죽이었지만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눈물들을 뚝뚝 흘려가며 함께 불렀다. 다음 장을 넘기니 그 때의 교장선생님과 모든 선생님들의 모습이 있었다.
“ -- 교장선생님은 이미 돌아가셨구 -- 이 선생님은 지금 어디서 교장선생님이 되셨구 -- 아무개 선생님은 지금 인천에서 뭘하시구 -- 아무개선생님은 교육감이 되셨구 -- 전교생이 삼백명 남짓했던 그 때 선생님들은 열다섯분이셨던가? 그런데 벌써 그 분들중 몇몇분은 세상을 뜨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왜 진즉 한번만이라도 찾아뵙지 못하였던고. 나만 나라고 나 하나만생각하며 사느라고 나를 사랑해 주시고 키워주신 분들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 자책감 때문에 더 슬펐다. 그 다음은 친구들이다. 이제 오십줄에 들어선 친구들의 모습이 빛바랜 사진으로 하나하나 애띠게 다가왔다.
“얘는 지금 어디 살고 뭘 하는데 좀 실패했다가 다시 일어섰고 -- 얘는 그곳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면서기로 출발해서 지금은 어디 뭘로 근무하고 -- 얘는 마누라가 죽어 다시 장가를 갔는데 집안이 어떻고 -- ”
나는 3학년 일반이었다. 개구장이들도 많았고 문학소년처럼 비오는 개울뚝길을 걸으면서 괜히 폼잡는 놈들도 몇몇 있었었지. 아무개는 그 때 우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학원이라는 잡지를 보다가 병든 소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무슨 소설에 너무 빠져 그 소녀를 환상적으로 그리워하다가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었어.
몇장을 넘기니 홍권이가 나온다. 안홍권! 나와 임진강변 선곡리에서 산길을 넘나들며 중학 3년을 내리 한반으로 지냈던 친구. 그는 그 당시엔 키도 적고 힘도 없었지만 노상 명랑했었어.
“홍권이는 사회에 나와 노가다 현장 소장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어 -- ”
아아 저런! 그리고 창만이 --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도 공부는 늘 일등이었던 친구. 그는 아마 우리들 보다 세살인가 많았지. 우리 모두 그 친구를 존경하며 의리 있는 친구로 신뢰를 했었는데--.
“창만이도 죽었어 -- ”
저런! 장가는 갔었나? 아니 장가도 못가고 정말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가 간 친구야. 어떻게 죽었어? 간경화가 -- 너무 술을 마셨어. 남자 동창들 중 벌써 유명을 달리한 친구가 일곱명이란다. 그 얘기가 남의 일 같지 않게 들려오는 것은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 늙어간다는 의미일까.
3반. 여자반 아이들이다. 이제는 이미 아줌마들이 되어 있을 그 수줍고 예쁜 우리 여자동창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무개는 선생이 되었고 아무개는 어디 보건소에 있고 누구는 미국으로 갔고 -- 그리고 학교 때 스캔들이 제일 많았던 아무개가 의외로 현모양처로 남편과 행복하게 살고 -- 그리고 나와 삼년동안 말없이 선잇골 골짜기를 넘었던 그 소녀. 동창들의 근황을 설명해주던 아무개가 흘끗 나를 올려 보았다. 난 얼굴이 후꾼 거렸다. 못나게 왜 그렇게 당황했을까.
“얘는 지금 소식이 잠깐 끊겨 있어. 군인하고 결혼해서 전방 어딘가 가 있다는 소문도 있는데 -- 확실히는 모르겠고 -- ”
왜 이렇게 가슴이 저려오는 것일까. 해맑고 수줍음 띤 그녀의 사진이 가슴에 와 콱 박히는 것같다.
“동창들중 아무개 아무개는 조심해 -- 소문으로는 친구들한테 이런저런 피해를 주고 다닌다는 거야.”
그러니 옆에 앉은 아무개가 맞어! 나두 그놈한테 얼마를 당했는데 -- 그러자 아무개가 소릴 지른다.
“닥쳐! 좋은 자리에서 그런 소린 집어쳐! 남한테도 사기 맞는 세상에 동창이 그랬다고 그러면 안되는거야! 그냥 불쌍한 친구놈 도와줬다고 생각 하자구!”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도 그 친구들 얼굴을 떠 올리며 쓸쓸해진다.
이런 저런 애잔하고 감격스럽고 슬프고 또한 그리운 마음이 뒤섞여 우리는 이차를 갔다. 내 사는 얘기를 하라니 딱히 할 말이 없다. 가난한 동네서 간신히 고등학교 졸업하고 가족을 돌보고 직장 내에서 인정받기위해 성실히 노력하고 이웃들과 친구들과 의좋게 지내면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 체제니 반체제니 모순이니 피디니 엔엘이니 -- 그게 얼마나 가소롭고 가당치도 않은 얘기일까. 또 무소유가 어떻고 종교의 진실이 무엇이고 한국교회의 문제가 어때서 난 어드렇게 했고 민중들과 어쩌구 한다는게 얼마나 그들을 피곤하게하고 주눅들게 만들겠는가.
그냥 웃으면서 술이나 마시자! 그랬더니 그들도 그게 좋다고 선선히 받아줬다. 아직도 마누라 눈치 보며 들어가야겠다는 친구들 몇몇은 돌아갔고 남은 우리들은 노래방으로 들어가 노래도 부르고 -- 어릴적 호기를 부리며 휩쓸려 다닐 때처럼 거리를 한바탕 휘젓고 다니면서 이젠 자주 만나자, 아이들 결혼 때나 부모님들 돌아가실 때는 꼭꼭 모이자 -- 그리곤 헤어졌다. 마지막전철을 타고 인천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버스에 타니 친구들 얼굴들이 정말 영화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잇속 차리지 않고 친구들간에 “거래”할 꿈도 꾸지 않고 만나는게 중학교 동창들이란다. 그런 그 친구들과 삼십몇년을 동떨어져 살아 오면서 나는 -- 그 긴긴 세월을 무슨 짓을 하면서 이토록 힘들게 보냈던가. 정말 왜 그랬을까.
이 나이 먹었는데도 내 귓속에는 여전 임진강변 포성소리가 들려온다. 내 가슴엔 아직 -- 이 나이에 -- 주착스럽게도 그 소녀의 수줍고 애잔한 모습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가슴시린 그리움은 언제나 끝이 나려나. 아아 그리고 노오랗게 핀 한송이 민들레꽃 -- 그 꽃잎이 나를 여전히 서럽게 한다.
[민들레별곡 / 강진호]
* '민들레별곡'으로 쓰여졌던 글은 이제 '색 바랜 앨범'을 끝으로 모두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