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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민들레별곡

민들레별곡 그 후

by 천 지 인 2008. 11. 18.

민들레별곡 그 후


강진호 목사님(나와 지인들은 선생님이라 호칭하였다)과의 소시적 인연으로 지니고 있던 ‘민들레별곡’ 디스켙, 2007년 새해 들어 낡은 디스켙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하고 반가움과 아까움에 이곳에 수록하였다. 그 후 ‘민들레별곡’의 무대였던 백마장과 선생님 말년의 영종도를 방문하고자 하였으나 게으름으로 인해 차일피일 미루어진 것이 2년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에는 굳이 순서가 없다’는 생각으로 불쑥 영종도를 찾았더니 함바집이 있던 자리는 골프장으로 변해 있다. 공원묘지를 가는 길은 운서지구 택지개발공사로 인해 길은 끊어지고, 공사용 임시도로가 뻗어 있어 방향감에 의지해 찾아 갔다.

2005년 3월 영종도 근무지를 떠나면서 찾아뵙고 처음이니 나도 참말로 무심한 놈이다. 나의 무심을 탓하듯 영종도는 또 한 차례 격변중이다. 공원묘지는 더 이상 들어찰 곳이 없을 정도로 死者들로 들어찼으며, 무덤가의 나무는 묘지 앞의 소란스러운 공항고속도로를 가려줄 정도로 키가 자랐다. 나는 어느덧 40 중반이 되어 살은 늘고 머리카락은 빠졌다.     

[함바집 자리의 골프장]

 

내나이 20대 후반에 백마장 똥개울 근처의 선생님 댁에서 처음 만났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대낮임에도 그곳은 깜깜한 암굴이나 다름없다. 허름하게 지은 낡은 집에 햇빛은 들어오지 않고 책상을 비추는 조그만 스탠드 불빛 하나만 밝혀 있다. 그러나 사방의 벽에 빼곡하게 채워져 어슴푸레 보이는 책들은 그 집을 결코 누추하다고 생각치 못하게 한다.

그날 나는 낮술에 취했다. 그래도 손님이라고 동내 점방에 다녀오시더니 주섬주섬 소주에 문어발을 내놓으시더라. 내 나이 20대였으니 술이 없어서 못 마시지, 안주가 없어서 못 먹겠는가? 전직이 목사라더니 언변도 청산유수다. 하늘의 이치에서 시작하여 이 땅의 사람들까지 화제가 종횡무진이다. 나름대로 토론에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나는 그날 그 분의 말발에 떡이 되고, 결국 깡소주에 절어 개떡 되었다.

술이 거나해질 무렵 선생님께서 거침없이 던지신 한마디.

“니들이 민중을 알어?”

“ .... ”   

[영종도 공원묘지 전경]


그 뒤로 나는 여러 사람을 그 집으로 데려 갔다. 영화를 좋아 하는 사람, 산을 좋아 하는 사람, 정치를 꿈꾸는 사람, 술이 고픈 사람, 사람이 그리운 사람 등등...  당시 강선생님은 목사 때려 치고 나서 집안 살림은 사모님의 노동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날이면 날마다 콧구멍 벌렁 거리며 술 냄새 찾는 인간들이 꼬이니 아무리 깡소주에 문어발로 접대한다고 하더라도 없는 살림에 부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곳을 찾는 인간들도 주머니가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홀아비 심정은 과부가 안다고 그렇게 서로의 처지를 짐작하면서 소주잔을 돌렸다.

그래도 손님인지라 허구한 날 깡소주가 미안하셨는지 어느 때는 잔치상을 펼쳤다. 황해도식 보신탕 - 강선생님 고향이 황해도이다. 먹어보니 황해도식은 들깨가루 보다는 야채를 많이 넣어서 담백함이 그 특징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음식에 들깨가루를 듬뿍 넣는 경우는 대부분 음식솜씨가 변변치 않더라. - 으로 한 솥 끓여서 내놓으니 그 말 많던 인간들의 잡소리가 뚝 끊겼다.

우적우적... 

쩝쩝... 

후루룩...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선생님은 1997년부터 영종도로 들어 가셔서 삼목나루터 근처에 함바집을 냈다. 당시 나는 몇 번 그곳에 들어가서 밤새 마시다 인부들 숙소에서 잠을 자곤 했다. 그리고 인천에 나와서 생활 하다 보면 선생님으로부터 들어오라고 연락이 온다. 그러면 또 시간 내어 들어가서 마시고 자고.

2000년 여름에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강목사님 돌아 가셨다는데 다녀왔냐?”

“무슨 소리? 소식 못 들었는데...”

부랴부랴 일정을 조정해서 선배와 함께 영종도 함바집으로 들어갔다. 사실이었다.

목사님은 열흘 전에 간경화로 돌아가셨으며, 연락처를 남기지 않아 대부분의 지인들에게 연락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생님의 큰아들과 함께 영종도 공원묘지를 찾았다. 장례를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여름날이라 무덤가의 풀도 바짝 말라 있었다.

공항공사 막바지라 주변의 함바는 이제 철거 신세라며, 영종도 생활을 정리하고 부천으로 떠날 것이라는 사모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몇 푼 안 되는 부조를 하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사람 좋은 웃음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술잔을 들이키다 따끔하게 쓴소리를 던지던 목소리가 쟁쟁하다. 언젠가 월미도에 낮술을 마시러 함께 술집에 들어가니 주모 왈 목사님 보고 ‘스님이시냐’고 묻더라. 전직 목사가 머리를 삭발하고, 잿빛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나타나니 그럴만도 하다. 그날 강선생님은 대낮에 취해 월미도 한 복판에서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갈채를 받으며. 아마 그 분이 꿈꾸던 세상은 높낮이가 없는 그런 곳이었으리라.

당시 선생님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사람들 중 한 명은 연락 두절이다. 날품팔이로 하루 벌어 마시고, 마시다 돈 떨어지면 일 나가는 생활을 반복하더니 언젠가 소식이 끊겼다. 또 한 명은 2003년에 생을 마감하고 부평공원묘지에 영면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술잔을 끼고서 밤마다 주막을 전전하며 술잔을 부딪히고 있다.


- 천 지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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