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詩人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려면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화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새해가 되면 해맞이 하러 장터목에서 밤을 새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넓은 품에 다녀온지도 십수년이 지났습니다.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지리산을 오르던 이립(而立)의 시절을 지나
어느덧 불혹(不惑)을 훌쩍 뛰어 넘은 것입니다.
넓디 넓은 지리산에는
이름 없는 골짜기는 있을지언정 사연 없는 골짜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리산은 ‘오른다’는 말보다는 ‘안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누구나 언제든 안아주는 지리산에서 궁극(窮極)의 모든 것을 보고 싶습니다.
하여 언제나 초심(初心)의 자세로 변심(變心)을 경계하며,
변하되 변덕이 아닌 관조(觀照)의 지혜를 배우렵니다.
- 천 지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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