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의 향기/시처럼

장작불

by 천 지 인 2010. 1. 22.

 

내장산에 다녀오는 길에 김제 모악산 근처의 숯가마 찜질방에 들렀다.

원래 사우나를 즐기는 체질인지라 목욕탕에 가면 남들보다 오래 그리고 여러 번 사우나를 들랑거린다.

그런데 나보다 더 찜질을 애호하는 동반자가 전통 숯가마의 효능을 강추하니 여정에서 빠뜨릴 수가 없더라.

황토 흙벽돌을 이용해 토굴형태로 쌓아올려 만든 전통 재래식 숯가마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기하다.

 

 

 


운이 좋아서인지 우리가 간 그날은 불 빼는 날이었다.

덕분에 숯가마에서 불 빼는 과정을 지켜 볼 수 있었으며,

방금 불을 빼낸 숯가마를 체험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불을 빼 내부의 온도가 최고조에 있을 때 숯가마를 '꽃탕'이라고 하는데, 담요를 뒤집어쓰고 들어가도 내부에서 1분을 버티기가 힘들다.

그렇게 뜨거운 꽃탕을 들고 나며 함께한 우리는 마냥 웃었다.

담요를 거적처럼 뒤집어 쓴 서로의 모습이 우스웠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눈을 깜박이는 순수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그렇게 나이를 잊은 채 아이처럼 좋아하며 시간을 보냈다.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목욕탕 사우나는 몇 번 드나들면 맥이 빠진다.

그러나 숯가마에서는 맥이 빠지기보다는 심신이 상쾌해지는 느낌이다.

참나무숯에서 나오는 음이온과 불을 꺼낸 다음 황토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이 어우러져 찜질에 뛰어난 효능이 있다는 것이 업소측 설명이다.

어쨌든 두어 번 찜질만 하고 나와서 양귀자 소설 '숨은꽃'의 무대인 귀신사(歸信寺)를 방문하려던 계획은 숯가마의 매력 앞에 여지없이 취소되었다.

 

 

 

 

 

양귀자는 '숨은꽃'에서 귀신사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드러나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낡고 허름한 귀신사의 풍경은 여행중의 온갖 화사한 기억을 다 물리치고 가장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물러 있었다.

경내도 좁고 볼 만한 석탑 하나 갖고 있지 않은 이유도 오랜 시간 마음으로 보고 마음을 채워 가라는 속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한바퀴 휘 둘러보고 나와 버리려는 자는 사절'이라는 팻말을 어디선가 본 듯싶다는 황당한 착각도 얼마든지 품게 만드는 그런 절이었다."

 

귀신사 방문을 포기하면서 바라보는 장작불이 한동안 잊혀졌던 노래를 상기시킨다.

막걸리 한사발 걸치고 동료들과 눈을 붉히며 참 많이 불렀다. 그땐 그랬다.

양귀자는 '숨은꽃' 막바지에 이렇게 고백한다.

"미로는 사실 처음부터 미로였다. 그러나 전에는 출구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었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미로는 너무 교활하다. 지식과 열정을 지탱해 주던 하나의 대안(代案)이 무너지는 것을 신호로 나의 출구도 봉쇄되었다. 나는 길 찾기를 멈추었다."

그렇다. 미로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피를 솟구치게 하던 시절이었기에 길찾기를 멈추지 않고 미련스럽게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백무산의 장작불은 그 자체로 많은 영감과 힘을 주는 시(詩)였으며,

길찾기를 멈추지 않은 우리의 무기였다.


 

 

 

       장 작 불

                             백무산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먼저 불이 붙은 토막은 불씨가 되고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늦게 붙은 놈은 마른 놈 곁에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몸을 맞대어야 세게 타오르지

마른 놈은 단단한 놈을 도와야 해

단단한 놈일수록 늦게 붙으나

옮겨 붙기만 하면 불의 중심이 되어

탈거야 그때는 젖은 놈도 타기 시작하지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몇 개 장작만으로는 불꽃을 만들지 못해


장작은 장작끼리 여러 몸을 맞대지 않으면

절대 불꽃을 피우지 못해

여러 놈이 엉겨붙지 않으면

쓸모없는 그을음만 날 뿐이야

죽어서는 잿더미만 클 뿐이야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 천 지 인 -

'문화의 향기 > 시처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천(歸天)   (0) 2010.08.12
그러려니 사소서  (0) 2010.06.01
강에는 눈만 내리고  (0) 2010.01.07
님 기다리는 마음  (0) 2009.09.18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0) 2009.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