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음악처럼

가을에 함께 하는 시

천 지 인 2007. 9. 2. 14:55

 

며칠전까지 뜨거운 밤의 열기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헌데 신기하게도 밤의 열기는 부지불식간에 사라지고 

새벽의 싸늘함이 이불을 끌어 당기게 합니다.

가을은 많은 것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무딘 감성의 소유자일지라도 한번쯤은 센티멘탈하게 만듭니다.

계절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세상은 무한정 애수에 젖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을의 정취를 흠뻑 즐기면서도

이백의 호기와 나은의 지혜로 애수의 계절을 돌파해야 겠지요 .... 

 

 

1. 벗과 함께 이 밤을 (이백)


천고에 쌓인 시름 씻어나 보고저

내리 백 병의 술을 마신다.

이 밤 이 좋은 시간 우리 청담(淸談)이나 나누세.

휘영청 달까지 밝으니 잠을 잘 수도 없지 않은가!

얼큰히 취해서 텅 비인 산에 벌렁 누우니

하늘과 땅이 바로 이불이고 베개로다.


友人會宿 (李白)

滌蕩千古愁, 留連百壺飮.

良宵宜淸談, 皓月未能寢.

醉來臥空山, 天地卽衾枕.


* 淸談 : 속되지 않은 청아(淸雅)한 이야기 또는 남의 이야기를 높여 이르는 말



달 밝은 가을의 밤은 자고로 나그네의 심금을 울리는 법.
하물며 천고의 가객 이백이 휘영청 밝은 달밤에 잠이 오련가.

하여 주선(酒仙) 이백은 유인(幽人)과 함께 내리 백 병의 술을 마신다.

이백에게 술은 한을 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술은 의기가 투합되는 사람과 속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청량제이다.

텅 빈 산중에서 그는 이야기에 취하고 술에 취한다.

그러나 무슨 걱정이랴.

공산(空山)이 내 집이고, 하늘과 땅이 금침(衾枕)인 것을!

 

 

 

2. 삼오칠언 (이백)


가을 바람 가을 달 맑고 밝은데

낙엽은 우수수 모였다 흩어지고

까마귀 잠자다가 소스라쳐 놀라네

그리운 임 만날 날은 그 언제일까?

이 계절 이 밤을 어이 지낼꼬


三五七言 (李白)

秋風淸, 秋明月

落葉聚還散, 寒鴉樓復驚

相思相見知何日, 此時此夜難爲情


* 寒鴉 : 추운 계절 나뭇가지에 을씨년스런 모양으로 앉아 있는 까마귀



이별의 노래야 고려시대 정지상의 “송인(送人)” 만큼 애틋한 표현이 있을까?

해마다 보태지는 이별눈물로 대동강물이 마르지 않으리라(大洞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派)는 구절을 읽다보면 지금도 가슴이 아련하다.

정지상 못지않게 이백은 가을밤에 뒤척이며 님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아마 가을의 깊은 밤에 모이고 흩어지는 낙엽의 소리에 놀라는 것은 비단 까마귀만이 아닐 것이다.

밤새 그리움으로 뒤척이던 이백 바로 자신이리라.

그런데 호기롭게 내리 백 병의 술을 마시며 천고의 한을 씻고자 했던 이백의 님은 누구였을까?

 

 



3. 속내 (나은)


득의할 땐 노래하고 실의할 땐 쉬어가며

근심 많고 한 많은 세상 그렁저렁 살아가세

오늘 술 생기면 오늘 취하고

내일 근심일랑 내일로 미뤄두세


自遺 (羅隱)

得則高歌失則休, 多愁多恨亦悠悠.

今朝有酒今朝醉, 明日愁來明日愁.


* 自遺 : 자기 마음의 생각을 구애 받지 않고 펴 보인다는 뜻이 있음.



고민으로 밤새 뒤척여 보았자 결과는 뻔하다.

공허하게 지속하는 고민은 오히려 내일의 생산성을 갉아 먹는다.

그러니 불필요한 내일의 근심을 오늘 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실의할 땐 쉬어가라 한다.

이 시를 실패자의 권주가로 오해하지 말자.

이 시에서는 근심 많고 한 많은 세상을 살아가려면 쉬어가고 미루는 지혜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 천 지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