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
1. 아름다운 무늬로 바뀌는 상처
.... 관솔은 가지를 자르면 송진이 그 상처로 모여 이루어진 거지요. 상처의 아픔이 관솔로 승화된 걸로 여겨 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감나무 같아요. 감은 딸 때 가지를 꺾어 한 알 한 알 따는데 가지마다 상처를 입게 되지요. 그 상처로 빗물 같은 것이 스며들어 이루어진 검은 멍자국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먹감나무 무늬지요....
.... 소나무는 상처를 관솔로 만들고 감나무는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만드는데 우리도 상처로 좌절하지 말고 상처를 딛고 보다 나은 사람, 보다 나은 민족이 되어야 겠다고 여겨 봐요.
나무를 만지면서 배운 것이 몇가지 됩니다. 소위 환경이 좋다는 곳에서 자란 나무는 단단하기도 향기롭기도 덜하고 메마른 곳에서 자란 나물수록 나이테가 쫌쫌하고 단단하고 아름답습니다. 향기도 아주 진합니다.
좋다는 곳에서는 뿌리를 깊이 박지 않고서도 수월하게 살 수 있지만 메마른 곳에서 자라는 나무는 뿌리를 깊이 박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데 땅에서도 역시 좋은 것은 깊은 곳에 있으니까 메마른 땅에서 자란 나무가 좋은 나무가 될 수 밖에 없지요....
2. 본업은 인생입니다
.... 우리가 서 있는 자리와 때(時空), 하고 있는 일은 알 수 있지만 그 일(삶)이 어떤 것인가를 판단하기는 힘듭니다. 세상사를 너무 쉽게 생각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살면 피곤해서 살기 힘들어요. 일을 통해 사람이 되고 사람의 됨됨이는 저울로 달 수도 잴 수도 없으나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좀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보자는 게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수필가와 기자가 대담을 하는데 기자가 수필 쓰는 이에게 “선생님의 본업은 수필이지요?” 하자 그는 “아닙니다. 저의 본업은 인생이고 수필을 쓰는 일은 부업쯤 됩니다.” 하는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 전 희망이란 건 잘 모르겠는데 꼴찌인 줄 알면서도 끝끝내 달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질까요 적어질까요? 점점 적어질 것만 같아요. 바보 병신 같은 사람이 적어지는 게 좋은 일 같기는 한데, 바보와 병신이 발을 붙이고 살 수 없는 세상이 과연 좋은 세상일까 생각해 보면 무서운 세상같이 느껴집니다....
.... 어디 달관한 사람이 흔한가요. 세상은 ‘달관’하지 못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집착에 대해서 저는 생각이 좀 틀려요. 집착해서 끈질긴 노력 끝에 도달한 다음 다시 큰 집착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끝끝내 지켜 갈 한 줄기 끈질긴 집착 뒤에 그 집착을 넓히고 깊게 해 가는 것이 삶의 일관성이 아닐까요.
또 ‘치우치지 말자’고 바라는데 태양빛도 지구를 지날 때 그쪽으로 굽는다고 합니다. 감정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치우치지 않겠어요. 슬픔이란 것도 치우침인데 자랑스러운 것이 지 부끄러운 건 아니지요....
3. 만남
.... “삶이란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이다. 그가 신부이건 창부이건 만남은 소중하다. 만남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준다. 반대로 만남은 무거운 재앙과 속박이 되기도 하고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선택해서 만난 것도 아닌데 우연한 만남이었다고 아무리 외쳐 봐도, 땅을 치며 통탄해 봐도 돌이킬 수 없는 뉘우침이 따르는 만남도 많다. 바로 이러한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사람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키워 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요. 만남이 곧 탄생이지요. 탄생이 만남이듯이.
마냥 즐거운 만남보다는 괴로우나 감격스런 만남에서 인생은 여물고 절실한 깨달음이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4. 근본
.... 세월이 만들어 주는 빛깔이 있습니다. 손때라는 것도 있지요. 과정은 조급함보다는 느긋함이고, 그 과정은 길수록 좋고 과정에서 삶은 이루어지고 결과에선 삶을 그르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인생도 삶도 과정이지 결과는 아닌 것 같은데 형은 어떻게 여기십니까. 이 과정을 풍성하고 감격스럽고 느긋하게 꾸려 봅시다....
.... 공자가 말했듯이 “인(仁)을 하느냐 마느냐는 스스로에게 달렸지 딴 데 있지 않다.”는 말처럼 그 근본은 그 개개인의 신념의 문제라고 해요. 주어지고 보장된 자유는 참된 자유가 못 되고 언제나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자유를 지킬 마음이 정말로 있다면 어떤 곳, 어느 때나 자유는 있는 것이 자유의 자유로움이랍니다....
.... 많은 사람이 입을 봉하고 살던, 군인들이 판치던 시절에는 입을 열고 제법 반항적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참 반갑고 고마웠지요. 말로 사람을 평가한 셈이죠. 삶은 보지도 않고, 차츰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알게 되고, 삶을 보고 사람을 가려 봐야겠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꽤 아리송한 존재라 판단하기가 쉽잖음을 알고 아주 간단하게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되풀이하는 일, 곧 밥 먹고 똥 누는 짓을 보고 인간을 판단하기로 했습니다.
세상의 용렬한 생각과 고상한 마음씨도, 구역질 나는 짓거리와 착한 행실도 굶주림과 배부른 그 어느 지점에서 이루어지니까요. 때때로 올챙이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개구리가 많긴 하지만요....
.... 살다 보니 당장 당장은 개판이 활개치는 것 같으나 긴 안목에서 보면 역시 하늘은 있는 것 같습니다. 짙고 엷은 갖가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그 구름 걷힐 날이 없지만 말입니다....
5. 장이
....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수확이 할아버지만 못했대요. 학교에서 배운 대로 질소, 인산, 칼리 비료를 배합해서 줬는데도 결과는 할아버지가 농사 지을 때만 못했대요.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물으니까 “너는 벼농사를 지으면서 벼와 이야기하지 않고 책과 이야기하더라. 나는 책하고는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벼와 많은 이야길 했다. 농민이나 목수나 다 마찬가지다. 목수가 나무와 이야기하지 못하면 목수가 아니다. 농민인 네가 기르고 있는 곡식과 이야길 나누지 못하면 농사꾼이 아니다.”....
.... 본질을 모르고 흉내 내는 것을 문화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자연을 확실히 알라면서 흙, 물, 공기, 태양을 알래요. 씨앗도 햇빛에 쪼여서는 싹트지 않고 땅에 묻고 물을 주어서 싹트는 이치를 알기 전에는 혼(魂) 빠진 것밖에 만들지 못한대요. 흉내 낸 것은 제것이 아니래요. 요즘은 흉내 잘 내면 금세 예술가가 되는데 옛날엔 예술가는 없었대요. 다 ‘장이’였지, 훌륭한 장이가 먼 훗날 예술가로 불리어졌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예술가라 불린 사람도, 자처한 사람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저자 : 전우익]
아호는 무명씨를 뜻하는 '언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일꾼'을 뜻하는 '피정(皮丁)'.
1925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중동중학을 졸업한 뒤 경성제국대학을 중퇴.
1947년 좌익 계열의 민청에서 반(反)제국주의 청년운동을 하다, 6·25전쟁 후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룸.
이후 연좌제와 보호관찰 처분을 받아 자유롭지 못한 신분이 되자 낙향하여 한평생을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2004년 12월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