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지 인 2007. 3. 10. 11:57
 

        가는 세월          

                     

                                       

  찌는 듯이 무더웠다가 느닷없이 장대비가 며칠씩 쏟아지고 그러다간 역시 또 느닷없이 태풍이 몰아치고··· 금년 여름은 정말 뒤죽박죽이다. 주택가 양켠으로 굴포천 똥개울이 흐르는 우리 동네는 저지대에 다 쓰러져 가는 낡은집들 투성이라 물에 잠기고 부서지고 날라 가고 줄줄이 새고··· 그래 여름 내내 찐득찐득하고 후덥지근하고 뒤숭숭한 세월을 보냈다. 그런 기분 나쁜 여름이 언제 끝나려나 그랬던게 엊그젠데 오늘 아침엔 벌써 찬바람이 싸하게 와 닿는다. 벌써  초겨울이다. 아 언제 세월이 이렇게 빠른가.

  어느새 초겨울 왔는데도 아래쪽 홍씨는 며칠째 코빼기도 안 비친다. 백마교 위쪽 박가도 일주일동안 넘석도 안한다. 동씨는 비실비실 한번쯤 다녀간 이후 역시 소식불명이다. 수다쟁이에 주착바가지에 온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발발이 최씨아줌씨도 기뭄에 콩나듯 이틀에 한번 정도 삐죽 나타났다간 사라진다.

  이른 아침에 개울가 뚝방에 쌓아놓은 판넬 못 빼기 작업을 하고 있는데 구통장 최씨가 찾아왔다. 홍가가 다 죽게 되었단다. 허구헌날 밥 한숟갈 안 먹고 술만 퍼마셔대다가 술병이 나서 그렇게 나자빠진게 한두번은 아니지만 이번엔 좀 수상쩍다고 걱정을 한다. 그래 같이 가봤다. 피골이 상접해 해골만 남아 누워 있던 홍가가 눈만 멀뚱거리며 우리를 본다.

  “시퍼렇게 젊은 놈이 술만 처먹으면 민폐나 끼치구 돌아다니더니 언젠간 결국 그 꼬라지될 줄 알았다. 아예 칵 뒈져나 버려라!”

  최씨가 버럭 소릴 질러도 홍가는 기침만 숨가쁘게 해댈뿐이다.

  꼭두새벽부터 술에 쩔어 있는 홍가는 위아래 남녀노소도 없는 막가는 인생이었다. 팔십 다 된 노인네고, 젊은 아낙네고, 술만 취하면 이놈 저년에 온갖 육두문자를 써가며 싸우자 대들고 그러다간 얻어 터지고 깨지고 잡혀가고··· 정말 이틀이 멀다 않고 그꼴로 살아 왔다. 온동네 사람들이 진저릴 내고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며 상대도 안해주고 그러면 더 싸납게 꼬장을 부리고 그러다 종당엔 저 모양으로 쓰러져 버린 것이다.

  시체처럼 누워 있는 홍가를 보고 나니 다른 사람들도 걱정이 되어 한바퀴 돌아 보기로 했다. 홍가와 쌍벽을 이루는 주태백이 욕쟁이 쌈쟁이 박가도 곧 다 죽어가는 인간처럼 골골대며 누워있었다. 운전대만 잡으면 눈빛부터 살기가 돌고 다른 차가 좀 끼어들기라도 하면 온갖 욕설을 퍼붓고 그래도 성이 안차 쌍라이트를 번쩍거리며 같이 죽자식으로 뒤쫓아가는 폭력운전사 동씨는 병명이 뭔지도 모른채 하루 종일 화장실만 들락거리고 있었다.

  자기 잇속 차리는데는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고 그렇게 이악스럽고 악착을 떨던 최아줌씨는 안면근육이 때도 시도 없이 굳어진단다. 어떤 한의원에 갔더니 풍끼가 있으니 돼지고기 닭고기 삼가고 성질도 부리지 말고 당분간 조신하라고 일러줬단다. 중풍 걸릴까봐 겁이 나서 딴에는 맘 다스리는 시늉은 하고 있지만 수십년 지 성질대로 부려먹은 그놈의 마음이 한순간에 순순히 다스려질리 만무하다. 그러니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겠다고 날뛰는 미친 마음심을 부여안고 낑낑거리는 그 모습이 더 한심하고 측은하다. 업보다 업보야!

  줄줄이 난리법석 치며 지나간 이번 여름도 거뜬히 넘겨버린 저 인생들이 왜들 저렇게 죽을 지경에 빠져버렸는가. 걱정이다.

  이른바 민중들의 한많은 사연과 분내는 역사를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언놈은 마누라 누구와 눈맞아 도망가고 나서부터 훼까닥 돌아버렸고 한 아줌씨는 과부몸으로 기껏 키워논 외아들 며느리 얻고 나자 시어미 잔소리 듣기 싫다며 며느리가 외아들 꼬드겨 아예 미국으로 도망가 버렸으니 속에 울화를 안고 산다. 거창하게 사회과학을 들먹이며 체제니 구조를 탓할 수도 있다. 허기야 지금의 사회구조라는게 사람을 들들 볶고 못되게 만들기도 한다. 죽기살기로 앞으로! 앞으로! 빨리빨리! 달려가야 하고 수단방법 안 가리고 긁어 모아야 되고 걷어차고 밀어부쳐서라도 승승장구! 높이 올라가야 되고··· 그러니 그 지독한 경쟁에서 이미 탈락한 우리의 이웃 아줌씨 아저씨들은 그것이 억울해 술로 욕으로 싸움으로 분풀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당신들 손해라며 내가 한마디 했다.

  왜 눈들을 빨갛게 뒤집어 뜨고 독기를 품고 노려봅니까. 왜 곧 죽일듯 으르렁대며 을러대고 그러냐구요. 왜 노사니 남녀니 천지니 여야니 너와 나 이편저편으로 갈라대며 죽자사자 편싸움을 벌입니까. 왜 배가 맞아 도망가고들 그래요? 나 참 이상하네.

  그중에 그나마 뭣 좀 안다고 나불대는 박가가 이렇게 말했다.

  “지쳤어요!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뒤쫓아 가기가 너무 힘들어요! 악발이로 악착같이 산다는 게 힘들어요! 아 정말 무서워요!”

  차를 타도 식당엘 가도 전화 한통을 걸려 해도 온통 살기를 띠고 악착을 떨고 어거지를 부리는 사람들 투성이다. 아 정말 지쳐버렸다. 먹을 게 없어 배를 곯던 시절에는 이것저것 악착도 떨고 극성을 부려도 생존할 희망으로 버텨내지만 요즘같은 세월엔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 종당엔 저렇게 쓰러져 덧없는 죽음만 맞이할 뿐이다. 얼마나 허무한가.  

  철 모르는 어린 시절에는 비칠거리며 걷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뛰다가 깨지기도 한다고 하자. 싸우면서 큰다는 게 일리가 있다고도 치자. 그런데 나이가 삼십이나 된 다 큰놈이 아직도 열댓살 어린녀석처럼 응석받이 마마보이로 그냥 남아 있다면 그 꼴을 구역질나서 어떻게 봐 줄 수 있겠는가. 큰놈은 안팎이 큰 게 정상이다.

  무더위와 지겨운 물난리와 사나운 태풍이 한바탕 요동치며 지나간 이번 여름에도 우리는 철부지처럼 싸우기도 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하고 오기로 맞서기도 하면서 기어코 버텨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새 겨울의 문턱에 서 있다. 죽은 것도 있고 죽정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여물고 탐스러운 생명의 열매들이 훨씬 더 많다. 그게 세월을 버텨낸 생명들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가을은 풍요롭고 의젓하고 이 초겨울은 넉넉하고 너그럽기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잘난 인간들이 만드는 사회가 기왕 좋게 만드는 사회라면 생명의 기운이 주렁주렁 왕창왕창 실하게 열려 그 생명의 열매를 먹고 악쓰며 살다 지쳐 쓰러진 우리의 이웃 홍씨 박씨 동씨 그리고 최아줌씨가 벌떡벌떡 일어났으면 진짜 신바람이 나겠다.


[민들레별곡 / 강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