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민들레별곡

모든 게 어디 탓이라구요?

천 지 인 2007. 2. 22. 10:09
 

   모든 게 어디 탓이라구요?       


  얼마전에 남순할매 생신이셨다.

  생신잔치 번듯하게 차려줄 아들자식도 없고, 그렇다고 돈도 없고, 마땅히 음식차려 대접할만한 장소도 없으신 할머니인지라 이집 저집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하시는 것을 정씨형수와 앞집 김씨가 알고 얼마씩 추렴해 음식을 준비하고 가까운 몇몇을 불렀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할머니는 눈물나게 고마워하셨고 우리 또한 흐뭇한 기분들이 되어 마지막 마무리를 잘하고 헤어질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에 박가가 들이닥쳤다.

  전주가 있었는지 눈동자가 풀려 있었고 줏어 섬기는 말은 발음이 분명치 않았다. 막무가내로 들어와서는 돼지도 않는 소리를 꽥꽥 지르며 떠들어대니 그 좋았던 분위기가 꺠져버릴 순간인데 이 박가가 벌떡 일어나더니 불쑥 밖으로 나간다.

  그놈 참 잘 나갔다! 모두 속이 시원해져서 흐트러진 분위기를 되잡고 있는 중에 이 박가가 비칠거리며 다시 돌아왔다. 손에는 자기 분수에 어울리지도 않게 커다란 케잌까지 사들고··· 그래 어쨌거나 그 성의가 고마워 우리는 박수를 쳐줬고 케잌 위에 촛불을 켜고 할매에게 어서 끄라고 재촉하면서 ‘헤피 보쓰데이 남순할매!’를 합창했다.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케잌 사온 고마운 마음씨 생각해서 이사람 저사람 쏘주 한잔씩 건네줬고 주는 데로 받아 마신 박가가 생신 맞은 남순할매에게 축하주 한잔 따른다며 큰컵 하나 가득 깡쏘주를 따르며 수작한다.

  “할매! 할매겉은 좆겉은 인상(생)이 생전 원제 요런 케이크를 받아나 보셨겄소! 내나 되니까 할매 생각해 요런 거라두 하나 사오지, 여그 저런 좆겉은 인간덜은 기껏해야 쏘주 몇병일거요. 안그라요?”

  민망해진 할머니가 술이나 먹게, 그런말 하는게 아니네··· 달래고 얼르는데도 그놈은 더 큰소리로 주정이다.

  “솔직히 말혀서 할매가 저그 저 인간덜헌티는 평소에두 쓴 쏘주 한잔이락두 사주구 내헌티는 별볼일 읎다 이걸루 대해준기 사실인디··· 그란디두 지가 사만원짜리 케이크를 사온 이 싯점에 저것덜은 뭘해줬냐, 이것을 묻고 싶은 것이다 이거요.”

  개판 되어가는 분위기에 다들 손도 못쓰고 속수무책으로 앉아있는데 성질 급한 동씨가 기어이 박가 멱살을 틀어잡았다.

  “요런 순 나쁜놈의 새끼! 그래 이 자식아 그 잘난 케이크 하나 사들고 와갖구서 개좆겉은 공치사나 늘어 놓구 할매 가심(슴)에 못질이나 해?”

  그러자 박가는 한술 더 떠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동씨가 방세가 몇 달이 밀렸느니, 바로 엊그제 텔리비젼 새로 산 거 돈을 못줘 실어갔다느니, 자식새끼라구 하나 있는게 공부도 못하고 싸질러만 다니고 어쩌고 참 치사한 얘기들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개코 같은 집구석 하나 차고 있는 박가(실은 과부 누나가 박가보고 관리 좀 해달라고 부탁해논 집이지만)는 자기집 문간방에 세들어 살고 있는 동씨나 동씨부인을 여늬 떄도 아주 우습게 보고 막말을 해대곤 했는데 그런 저런 사연이 가슴에 맺혀있던 동씨가 그날은 드디어 폭발을 하고 말았다. 치고 받고 머리로 들이받고··· 옷이 찢어지고 코피들이 터지고 종당에는 결국 파출소로 둘이 끌려 가고··· 그날 남순할매 기쁜 칠순잔치는 그렇게 가슴아프게 끝이 났다.


  어찌어찌 나를 알게 된 박아무개는 만나 알게 된 순간부터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더니 아주 깍듯이 형님 대접을 해준다. 그게 열달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십 수백사람 겪으면서 이런저런 사람 속 들여다보며 살아온 나는 형님대접 해준다고 꺼뻑 죽고 그런 위인들과 단박에 부화뇌동해가며 당파지어 몰려 다닐 위인은 아니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는 말이다. 이 박가가 열달 정도는 아주 그럴듯하게 잘 넘기더니 꼭 두주일전부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그 해대는 짓거리가 영 치사하고 야비하고 교활한 것들뿐이다.

  술 한잔만 처먹어도 영낙없이 꼬장을 부리는데 그 상대가 힘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거나 속이 뒤틀려도 그저 꾹 참는 소심한 사람들, 아니면 좋은 게 좋다고 이것저것 쓸데없는 시비 붙을까봐 겁이나 슬슬 피해 다니는 사람들··· 하나같이 맘씨 좋고 심성 좋은 사람들뿐이다.

  싫어 죽겠는데도 큰소리 나고 멱살잡이 될까봐 오냐 오냐 받아줬던 조씨는 밤 한시고 두시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괴롭히는 박가 떄문에 요즘은 아예 늧게까지 잔업을 하고 박가가 지랄을 떠나 안떠나 살피고 나서야 들어 오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동씨 아줌씨는 거의 매일밤처럼 처마밑 유리창을 부숴대는 박가 떄문에 노이로제에 심장병까지 얻게 되었단다.

  박가는 돈 몇만원 빌려주곤 두고두고 그 사실 우려먹고 술 한잔 사주고도 두고두고 그 공치사 떠벌이고 다녔다. 제딴에는 잔머리 잘돌리고 자기가 꽤 잘났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고 자기가 그렇게 꼬장 부려도 대개의 인간들은 슬금슬금 피하기나 하는 겁쟁이들이라 치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박가의 그런 판단은 보통 우리들이 살아 가는 우리 이웃사람들의 모습을 제대로 꿰뚫어본 것인지도 모른다.

  나남죽없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날이면 날마다 찾아와 땡깡을 놓고 경찰에 안달려 갈만큼 시비를 걸고 어쩌다 한대 때리면 그냥 그자리에 거품을 물고 벌렁 누워 버리고··· 경찰에 신고해서 잡혀갔다가 다시 나오면 또 찾아와 곤죠를 부린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진저릴 내고 겁을 먹고 결국엔 손을 들게 마련이다.  

  불의에 분노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정의도 운운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제아무리 날고 뛰는 운동가라할지라도 이런 속수무책의 주태백이 곤죠통에게는 정의고 뭐고 주먹 쥐고 구호 외칠 명분이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참고 기다리는 사랑도 나 하나하고만 관계라면 혹 그럴 수 있지만 가족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보고 이웃의 약하디 약한 사람들이 떼거지로 고통을 당한다면 그 사랑이라는 것도 아무나 떠벌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몇번씩 처들어와 팬티까지 홀라당 벗어 던지고 염병 지랄을 떤다면 마더 테레사도 별 수가 없을 것이다. 두둘겨 패 끝장을 내면 속시원 하겠지만 이젠 나이 들어 그만한 힘도 없고 또 법이라는게 거간의 사정은 거두절미하고 예! 아니오! 때렸어? 안 때렸어? 몇주 진단 나왔어? 그걸로 판결을 짓겠다고 오라가라 해대니 그거만큼 황당한 것도 없다.

  내 박가를 더 나쁘게 보는 것은 자기 동네선배 어쩌구 하는 위인을 만나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말도 안되는 가관이었다. 그 선배라는 작자가 이새끼 저새끼 씨벌눔··· 아주 쌍욕을 입에 달고 눈을 부라리고 곧 주먹으로 칠듯 다그치니 글쎄 그 인간이 고양이 앞에 쥐모양 꼼짝도 못하고 소리없이 도망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가장 비열하고 악한 놈이 약한 사람에겐 강하고 강한 놈에겐 굽실거리는 놈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박가의 그 꼬라지를 보고 나니 구역질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할머니 생신이 그렇게 된 날 밤 열두시쯤 파출소에서 풀려난 박가가 우리집에 찾아왔다. 예의 그 야비하고 잔인한 미소를 실실 거리며 부엌에 들어와서는 웃통을 훌렁 벗어 젖히더니 부엌바닥에 그냥 누워 버렸다. 다 큰 딸년이 그 모양을 보고 비명을 지른다. 참고 또 참아 간신히 타일러 집으로 보냈다. 삼십분도 안되서 다시 찾아 왔다. 밖으로 끌고가 똥개울가에 앉으니 온갖 개소리에 잡소리를 늘어 놓으며 아주 막친구하자 까분다. 그래 그걸 간신히 끌어다 집에 데려다 놓고 돌아 왔다. 밤 두시에 또 찾아 왔다. 아내나 딸아이나 도무지 신경이 쓰여 깊은 잠을 못자고 있었다.

  새벽 다섯시에 또 찾아 왔다. 이번엔 소주 세병에 막걸리 두통까지 사들고 와서는 굳이 먹어야 된다고 시비를 건다. 똥개울 다리가에서 난 잠시 하늘을 쳐다 보았다. 힘이 들었다.

  하느님!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리고는 그놈을 다리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이 약아빠진 놈이 뭔 눈치를 챘는지 안 끌려오려고 하기에 팔을 뒤로 비틀어 버렸다. 비썩 마른 놈의 팔이 아주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문곡직 한시간을 두둘겨 패니 이 치사한놈이 성님 어쩌구 해가며 사실은 그게 아니고 또 어쩌구··· 설맞은 놈이 꼭 다시 시비를 붙는 법이라 몽둥이 찜질 몇번 더했다.

  “이른바 양반이라는 놈들이 꼭 더 나쁘고 못된 것만도 아니다! 또한 이른바 민중이라 부르는 인간들이 꼭 선량한 것만도 아니다! 네놈이 사회구조, 체제라는 말은 어디서 줏어들어와 가지고 모든 걸 거기다 돌리려구 한다만 너겉이 나쁜 놈은 양반들 나쁘다 할 자격두 없구 사회구조가 어떠니 떠들 필요두 없다! 이제 다시는 우리집에 발길 들여놓지 말것이다!”

  그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나빴다. 


[민들레별곡 / 강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