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여름을 보내고 맞이하는 초가을은 피부가 먼저 달라진 열기를 감지합니다.
그러나 겨울을 예고하는 늦가을의 서늘함은 코끝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집니다.
가을이라고 다 같은 가을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느낌으로 다가서지 않습니다.
같은 사람도 그 느낌은 자신의 처지와 감정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술과 함께 단풍잎을 마주하며 (醉中對紅葉)
백거이 (白居易)
늦가을 찬바람 을씨년스런 나무 臨風梢秋樹
술잔 마주하고 앉은 쓸쓸한 노인 對酒長年人
취한 모습 서리 맞은 나뭇잎 같아 醉貌如霜葉
불그레하지만 청춘은 아니라네 雖紅不是春
백거이는 늦가을 찬바람과 을씨년스런 나무,
쓸쓸한 노인과 서리 맞은 나뭇잎을 대비하였습니다.
이렇게 나열한 회색빛 색채에 술잔을 얹어 불그레한 홍조를 띄웁니다.
하지만 노인은 청춘이 아닙니다.
쓸쓸합니다.
나그네는 잠 못 이루는데 (宿濟州西門外旅館)
조단우 (晁端友)
썰렁한 숲 해질녘 새들이 깃들 무렵 寒林殘日欲棲鳥
여관방 벽등 희미한 불빛 壁裡靑燈乍有無
비 부슬부슬 내리는데 나그네는 잠 못 이루고 小雨愔愔人假寐
타고 온 말 늦도록 꼴 씹는 소리만 누워 듣는구나 臥聽羸馬嚙殘蒭
하지만 쓸쓸하기로 치면 나그네만 할까요.
나그네의 외로움과 복잡한 심경을 이백은
'달빛 쓸어버릴 수 없고 나그네 시름 형용할 길 없다(月色不可掃 客愁不可道)'고 표현했지요.
1980년대 중반에 소설가 이제하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시절, 우리 모두를 핍박하던 1980년대 중반.
암울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나그네였으며, 마음 편히 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관방에서나마 쉴 수 있었던 宋나라 때의 나그네는
비록 잠 못 이루지만 이제하의 나그네보다는 여유롭습니다.
[사족]
허름하지만 사람 냄새 나던 1980년대의 여인숙,
그곳에서 숙박할 수 있었던 나그네는 그나마 다행입니다.
첨단시설로 완비된 2000년대 모텔에서 몸은 편히 쉴지언정
나그네의 영혼은 쉬지 못할 듯합니다.
- 천 지 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