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빈둥거리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끔 찾는 곳이 배다리 헌책방이다.
그곳은 편안하고 조용하다. 동내의 건물 자체가 낮아서 고압적이지 않다. 오가는 차량이 드물어서 소음이 적다. 그리고 책방의 특성상 가게 자체도 조용하다.
연세 드신 분들이 운영하는 책방은 가끔 낮술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이 이곳은 술자리조차 조용하다. 대화와 웃음이 오가지만 결코 시끄럽지 않다. 그런 경우 눈이야 책을 구경하지만 귀는 동내 어르신들의 기분 좋은 한담에 쏠려 시간 가는줄 모른다.
그런데 책값은 더더욱 기분이 좋다. 만 원짜리 지폐 두 장만 지니면 대여섯 권의 책을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신간서적 한두 권을 구매할 수 있는 돈으로 이렇게 헌책을 구입하면 일단 포만감에 젖는다. 누군가 “문자의 본질은 지배권력에 영속성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파하더라도 어쨌든 이순간만은 뿌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책방 예찬론자들이 말하는 묘미는 모르겠다. 찬란한 고서나 절판된 희귀도서를 발견하는 ‘행운론’ 또는 ‘보물찾기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헌데 나의 안목은 그곳에서 보물을 찾을 만큼 넓지 못하다.
하지만 고서나 희귀도서를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헌책방에는 매력이 있다. 발간 당시 나의 관심사에 밀려서, 또는 누구나 들고 다니는 베스트셀러의 천편일률이 싫어서, 보다 근본적으로는 돈도 없고 게을러서 구매하지 못했던 책들이 존재한다.
서적을 구매하기까지는 여러 단계의 검증절차를 밟아야 한다. 먼저 나의 문제의식을 사로잡아야 한다. 알량하지만 어쩌랴. 굼뱅이도 구르기 좋아하는 선호방향이 있듯이 나에게도 선호하는 경향의 주제와 저자가 있으니 우선 이를 충족시켜야 구매의 1단계를 통과하는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소개된 신간안내에서 통과된 책은 간단히 메모를 해두었다가 오프라인 서점에서 직접 책을 살펴본다. 서문과 목차, 후기 정도를 살펴보는 2단계 검증에서 흡족해지면 마지막 3단계 주머니 사정을 통과해야 한다. 이렇게 최종 3단계를 거쳐서 나의 책꽂이로 오는 책은 많지 않다.
그런데 선호도, 주머니 사정 등의 검증단계에서 탈락하여 잊고 지내던 책들을 헌책방에서 만나게 된다. 당시의 소견으로 외면했던 책들도 접하게 된다. 세월이 변하면 사고의 경향성도 변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변화된 조건에서 외면했던 책들을 다시 평가하고 구매여부를 결정하는 작업은 재창조의 과정이다. 그러니 헌책방에서 비록 고서나 희귀도서를 발견하지는 못해도 나름대로 보물을 찾는 셈이다.
그러나 헌책방에는 신간의 향긋한 냄새가 없다. 오히려 헌책 속에 장시간 있다 보면 먼지 때문에 코끝이 간지러워진다. 그러니 대형서점의 시원함과 쾌적함을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 때문에 주눅 들지는 않는다. 바코드를 인식하는 기계음은 없어도 흥정과 에누리의 여지는 있다. 현대성과 세련됨은 없어도 근대성과 나른함의 여유가 있다. 예쁘고 상냥한 여직원의 미소는 없어도 편안함과 일상의 즐거움을 주는 할아버지와 아줌마는 있다.
주말 아침 게으름을 잔뜩 피우고 나면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랫말처럼 아쉬움만 쌓인다. 그러나 헌책방 골목에서 부스스한 머리와 헐렁한 옷차림으로 두어시간 노닐다 몇권의 책을 들고 나오면 저무는 일요일이 결코 아쉽지 않다.
[천 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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